우여곡절 끝에 교실에 입장하였다. 이미 학부모들이 아이 뒤에 자리 잡고 앉아 오늘 수업 진행에 대한 담임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화장실 소동만 없었다면 제이의 환영을 받으며 활기차게 들어갔겠지만, 엄마의 지각에 마음 상한 제이는 샐쭉거리며 그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린다.
참관 수업이라고 해서 교실 뒷자리에 서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보는 건 줄 알았는데, 학부모와 아이가 함께 팀을 이뤄 5가지 미션을 수행하는 참여형 수업이었다. 서먹하고 경직된 분위기가 감돌자 담임 선생님이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였다.
' 오늘 유치원에 오시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 말씀해 주실 부모님 계실까요?'
그리고 정적.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여기저기 분위기를 살피는 선생님을 보니 참관 수업의 부담감이 참 크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냅다 손을 번쩍 들었다.
' 오~감사해요 제이 어머니, 오늘 오시면서 어떠셨어요?'
' 평소에 유치원을 올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교실까지 방문할 수 있게 돼서 오는 내내 많이 설레고 기대됐어요. 아니 그런데 1층 화장실에 하필 물이 안 내려가는 바람에 물 좀 퍼 넣느라 좀 늦었어요. 이런 다채로운 경험까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여러 모로 오늘 수업이 더 기대되네요 아하하하.'
'어머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에구머니나... 함께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름 나의 경험을 재미 삼아 함께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너무 TMI였나 싶기도 하고. 어쩌면 이 말에 함께 웃자니 당사자의 노고를 웃음거리로 여긴다고 오해할 수 있어 날 배려하여 다들 조용히 계셔 주셨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제이의 굳은 표정은 여전히 풀어질 기미가 안 보이고, 교실을 가득 채우는 긴장과 어색함은 아이든 어른이든 가리지 않고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이어서 선생님은 아이와의 손유희 놀이를 통해 긴장감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을 이어나갔다.
' 자 그럼, 제가 알려드리는 노래와 손동작을 따라 하시면서 경직된 분위기를 다시 풀어볼까요? 가마솥에 누룽지 박박 긁어서 오독오독 씹어서 맛있게 먹자~'
아이의 등에 대고 노래 가사에 맞춰 동글동글 쓰다듬다, 손가락을 세워 힘차게 긁어 내리고, 꼬집고 간지러움을 태우니 모두가 깔깔깔 웃음보가 터진다. 두어 번을 연속으로 하고 나니, 모두의 긴장은 가라앉고 조금은 말랑해진 분위기에서 수업이 이어졌다. 마침내 제이의 표정도 한결 생기발랄해졌다.
미션은 우리나라 전통 놀이와 관련해서 총 5가지로 나뉘었는데, 한글 모양에 맞춰 몸으로 글자 만들기, 전래 동화 퀴즈, 우리나라 지도 퍼즐 맞추기, 호랑이 떡주기(공 던지기), 전통 장신구 착용 후 폴라로이드로 사진 찍기였다. 그리고 각각 도우미 팀과 체험 팀으로 나뉘어, 도우미팀은 미션 설명과 미션 완료 시 도장 찍어주는 일을 하고 체험 팀은 손님이 되어 미션을 수행하면 된다. 단,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게임을 이끌어 나가야 하기 때문에 부모는 한글을 아직 떼지 못한 친구들의 한해 귓속말로 힌트를 주는 정도의 범위 안에서만 보조를 맞추면 되었다. 나름 세밀한 규칙과 각 팀 안에서도 수행해야 할 작은 미션들이 있어, 만만해 보이면서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낯선 이들에게 둘려 싸여 있는 상황에서는 종종 얼음이 되는 제이가 모르는 학부모들을 마주하며 이 복잡한 미션들을 시간 내에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사실 그런 지점 때문에 원에서의 생활이 늘 궁금하기도 했었다. 과연 본인이 해야 할 말을 참지 않고 잘할 수 있는지 친구들에게 휩쓸리기만 하진 않는지.. 내가 없는 공간에서의 제이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삐익- 시작하세요! 제한 시간은 15분입니다.
선생님의 호각 소리에 맞춰 아이들은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물쭈물할 줄 알았던 제이도 내 손을 붙잡고선, 호랑이 떡주기 미션에서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한다며 씩씩하게 이끌고 간다. 그러고선 손님 친구들에겐 공을 5개를 넣어야 도장을 찍어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야무지게 덧붙인다. 체험팀으로 교체되었을 때도 주저함 없이 적극적으로 몸을 크게 움직이며 득의양양하게 미션을 수행해 나가는 모습을 보니 익숙한 듯 낯설다. 물론, 잘 모르는 어른이 말을 걸 때는 금세 표정이 굳어 버렸지만, 자신이 해야 할 미션에서는 주저함이 없었다.
제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음에도, 아이는 내가 생각지 못한 전혀 다른 색깔과 온도로 본인의 삶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공간은 어딘지, 강당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벽에 붙어 있는 본인의 그림이 무엇인지, 공 던지러 온 손님 친구와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신경하게 툭 던지듯 말하면서도 뭐 하나 놓칠까 싶어 집중하며 말을 이어간다. 그동안 엄마는 잘 몰랐던 자기 만의 공간에 내가 들어오니,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잔뜩 있는 것 같았다.
수업 일정이 다 끝나고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와 헤어지는 걸 서운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우려였는지 제이는 해맑게 나를 안아 주고는 친구들에게 폴폴 뛰어간다. 교실 밖을 나가려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만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놀이를 시작한다.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에도 제이는, 잘 자라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그 눈부신 장면을 눈에 가득 담고 이내 나의 자리를 향해 길을 다시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