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스며들다
9살 조카는 여름방학이 오기 전부터 방학 내 할머니 집에서 지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다.
"할머니, 방학하면 바로 할머니 집에 가서 살 거예요!"
"할머니, 나 할머니 집에 언제 갈 수 있어요?"
"할아버지가 나 먼저 데리러 오면 안 돼요?"
가고 싶은 목적지가 분명한 아이에게 하루하루는 너무나도 더디고 가혹하다.
재하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제이의 마음도 덩달아 들썩인다. 할머니집과 불과 차로 10분 거리로 가깝게 살고 있는 제이지만, 만나도 부족할 정도로 절친한 사촌 지간이지만, 할머니를 사이에 둔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은 꽤나 치열하고 귀엽다.
유치원으로 옮긴 제이에게도 마침내 첫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유치원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만 방학을 알고 있던 제이는 재하의 할머니집 방문으로 인해, 집을 떠나 할머니집에서 실컷 놀아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만, 본인은 잘 참을 수 있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조촐한 짐을 챙겨 투스텝을 밟으며 뛰쳐나간다. 공허하게 닫히는 중문만이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리라.
여름 방학의 첫 주말. 가만히 서있어도 숨이 턱 막히고, 감히 바깥 활동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 8월 첫째 주의 더위는 우리를 근처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계곡으로 이끌었다. 좀체 떨어질 기미가 없는 더위를 피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계곡으로 모였다. 나름 휴양지 패션으로 차려입은 옷차림이, 점잔을 빼려는 나의 시도가 무색하게, 나이를 불문하고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이토록 나이의 편견 없는 물싸움이라니... 물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물을 맞는 순간 아드레날린이 점화하더니 타격 횟수에 따라 폭발력이 급증해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타격만으로도 사람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 H20안에 미처 밝혀내지 못한 우주의 원리가 숨겨져 있는는걸지도 모르겠다.
물맛을 본 나로선, 39살 vs 6살이 아닌, 인간 vs 인간의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자비 없는 나의 손맛에 지친 아이들은 댐을 쌓기 시작한다. 유속이 빠른 곳을 막겠다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신 돌멩이를 나른다. 그 모습을 지켜본 또래 아이들이 하나둘씩 동참하며 좌우로 기다란 댐을 만든다. 커다란 돌로 높이 쌓아 올려진 댐 때문에 흐르지 못한 물은 기어이 빈틈을 비집고 넘어가다 미처 완성되지 못한 댐 부분을 무너뜨리고 만다. 어찌 되었든 위에서 아래로 흐를 수밖에 없는 물의 사정을 아이들은 알까. 쌓아도 쌓아도 무너지는 댐에 흥미를 잃었는지 이제야 허기가 느껴지나 보다.
달큼한 짜장면과 얼큰한 짬뽕으로 물놀이의 허기를 채운 뒤, 할머니 할아버지가 평소 눈여겨보았던 다리 밑에 위치한 시에서 운영하는 물놀이장을 찾았다. 으레 친구들과 만나면 밥 먹고 2차로 카페를 가고 3차로 또 다른 카페를 가든 술자리를 이어지듯, 아이들도 차수를 거듭하며 새로운 놀이 장소를 찾는다는 사실에 그들의 에너지와 열정에 새삼 놀라고 존경해 마지않았다.
워터파크를 방불게 하는 물놀이장을 보며, 방금 전까지 어려있던 1차 물놀이의 고단함이 윤슬의 반짝임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들의 체력에 광기가 맴돌고 있음을 이곳이 폐장하기 전까지 막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나의 시냅스가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배까지 든든히 채운 제이와 재하는 본격적으로 산기슭에 걸친 여름을, 솟구치는 분수를, 일렁이는 물을 탐닉했다. 신나게 뛰다가도 목 끝까지 물속에 가라앉아 자란자란 흔들리는 물결을 느끼며 유영한다. 손발이 쭈글쭈글해진 게 뭐가 그리 웃기는지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웃음을 터트리다가도 물이 되고 싶은 건지, 바람이 되고 싶은 건지 연신 사뿐히 뛰어다닌다.
근심걱정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아이들의 해사함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그들 옆으로 다가가 자리 잡고 눕는 나를 발견한다. 피부가 그을릴까, 오늘 저녁엔 뭐해먹지, 내일은 뭐 하고 놀지, 애먼 걱정과 상념은 습한 공기 속에 산산이 부서지고, 현재의 시간에 해말 간 웃음만 퍼져 흐른다.
"휘익-! 오늘은 물놀이장 이용 시간이 끝났습니다. 모두 나오세요!"
방학의 첫날이 지나간다.
물놀이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아이들은 뒷좌석에 앉아 끝말잇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