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휴머니즘만 가득할 줄 알았지
유치원의 첫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오전 반차를 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유치원에 갔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위치 상 내가 등하원을 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유치원 행사가 있는 날은 언제나 기대가 되곤 한다.
오늘은 제이의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까,
수줍음이 많아서 모르는 어른들이 잔뜩 있는 교실에서 얼어 있는 건 아닐까,
제이는 친구들과 어떻게 지낼까,
하루에 절반 이상을 보내는 교실에서 제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참관 수업이 있기 전부터 아이는 내가 가는 걸 알고선, 자기 교실에 오는 방법을 잊지 말라며 연신 설명해 주었다. '엄마 입구로 들어와서 뒤를 돌면 계단이 있거든. 그 계단을 따라오면 벽에 잭과 콩나무 그림이 있어! 그 그림을 보면서 쭉 올라와. 그러면 앞으로 쭉 가지 말고 옆에 보면 우리 반 교실이 있어! 잘 찾아올 수 있지?'
친절하기도 하여라, 교실 못 찾아갈까 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지한 표정으로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귀엽다. 너도 나처럼 기대되는구나?
참관 수업은 11시 15분.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조금 일찍 유치원에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서 잠시 화장실을 써도 되겠냐 묻고는 1층에 있는 교직원 화장실에 들렀다. 일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교실로 올라가기엔 시간이 충분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분명 나의 오만이었다.
우아하게 준비하고 가려던 나의 계획을 비웃 듯 변기 물이 내려갈 생각을 안 한다. 변기 레버를 잘못 눌렀나 싶어 재차 눌러보아도 물 내려가는 소리는커녕 푸쉭푸쉭 바람 새는 소리만 공간을 가득 채운다. 시간은 벌써 11시 13분. 이걸 두고 가느냐, 도움을 청하느냐. 둘 중 뭐가 됐더라도 나는 공중도덕도 모르는 개념 없는 화장실 테러범이 될 테고 그로 인해 폐원하는 날까지 길이길이 회자되는 학부모가 될 테고, 나로 인해 제이의 유치원 생활은 평탄치 않을 수도 있다. 자, 어찌할 텐가.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해서 비어있는 물탱크에서 물이 솟아날 리 만무하기에 일단 밖으로 나와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가만히 서 있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니 마침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가증스러운 바가지가 수납장 위에 의기양양하게 놓여있다. 앙큼한 녀석. 급한 대로 바가지에 물을 담아 변기 물탱크에 퍼 나르기를 수차례. 민간인도 우주여행이 가능해진 요즘 세상에 변기 물탱크에 물이 마르는 게 가당 키나 한가. 그럼에도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나의 모든 운은 내 앞에 달랑 튀어 나와 있는 이 레버에 달려있다. 어느 타이밍에 눌러야 할지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은 이제 가득 찼다.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레버를 누른다. 가랏-!
쏴아아 아 푸쉬이이익 세차게 내려가는 물소리가 가히 베토벤의 교향곡을 능가하는 환희를 선사한다. 비로소 나는 자유다. 이 문을 열고 나가 기쁜 마음으로 2층으로 달려간다. '안녕 잭? 안녕 콩나무? 제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반갑다.' 세상은 반짝거렸고, 내 두 발은 깃털보다 가볍게 바닥을 튕겨낸다. 넘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고난을 이겨내고 계단을 오르는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웅장하고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 이제 내가 있어야 할 곳, 제이의 옆자리로 훨훨 날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