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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Apr 25. 2020

읽그 02. <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 문학동네



1999년 4월 20일. 총과 폭탄을 소지한 두 소년이 콜럼바인 고등학교를 찾았다. 그들의 이름은 에릭과 딜런. 둘은 친구 사이였다. 그들은 학교 안에 있는 다른 학생과 교사에게 총을 난사하고 폭탄을 던졌다. 총 13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범인 두 명은 현장에서 자살했다.


바로 20세기 말 최악의 테러 사건으로 불리는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이다. '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단 책 <콜럼바인>은 무수한 기록과 기억을 통해 사건의 정황과 영향력을 다룬다. 먼저 4월 20일에 발생한 일을 시간 순대로 보여준 다음,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과 범인 2명이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교차하는 서술 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방대한 분량의 증거 자료를 읽고, 관련 인물들과 인터뷰를 반복하며 사건 발생 후 10년 동안 이 책을 썼다. 적합하다고 판단한 기록이나 기억 몇 가닥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인터뷰에 응한 생존자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경험했다. 이런 환경에서 뇌는 환상을 만들어내며 사실을 왜곡한다.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중심에 있었던 목격자의 진술이 부정확해지는 이유다. 저자는 실제로 벌어진 일을 골라내어 정리하기 위해 생존자와 그 가족들, 심지어 비디오와 일지를 통해 남아있는 가해자의 의견 등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교차 검증한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확히 아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현장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들, 경찰과 검찰, 언론 등 사건에 개입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혼란이 가중되는 실제 상황에서도,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도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범인의 정보를 알아내는 데도 초기의 혼란이 있었지만,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물어야 했다. 그들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언론은 범인인 에릭과 딜런을 외톨이, 왕따의 피해자, 고스족, 네오나치, 인종차별주의자로 규정했다. 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는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미국에서는 97년도부터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고, 사건의 규모와 잔인성은 점점 심해졌다. 그리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건의 경우, 가해자를 따돌림을 당한 소수자나 사회 부적응자로 보는 프레임이 존재했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에 대한 사회 부적응자들의 범행'이라는 초기 언론보도와 달리 에릭과 딜런은 무차별 살상을 감행했다. 이전에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몇몇 교우가 있었으나, 그들을 골라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이 이 사건의 생존자 중 한 명인 까닭에 사건에 개입하게 된 FBI의 심리 전문가 퓨질리어의 생각도 언론 보도와 달랐다. 에릭과 딜런이 남긴 기록을 읽으며 그는 둘 중 한 명은 처음부터 살육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다른 한 명이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상 살상 계획과 실행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맡은 그 인물이 사이코패스 성향이 다분했다는 게 퓨질리어의 결론이었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난무했지만 그 속에 실제를 꿰뚫어 보는 보도는 극히 적었다. 사건을 유리하게 이용해 일종의 특수 효과를 노린 세력도 있었다. 지역 교회는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소위 순교했다고 알려진 피해자 중 한 명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 피해자의 어머니는 딸의 신앙심을 다루는 책을 내기까지 했다. 글쓰기는 그에게 치유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결국 교회와 유가족이 믿었던 죽음의 실체가 뒤집히고 만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왜'라는 질문이 남는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람들은 종교나 명백한 사실의 힘에 기댄다. 그러나 이미 가해자들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심문대에 세울 사람이 사라진 이상 범행 동기를 완벽하게 알아내기는 어렵다. 다만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정교한 추측은 가능하다. 


사건 이후 범인들의 집에서 발견된 녹화된 비디오 자료와 손으로 쓴 일지, 웹사이트 글 등은 그들이 범행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단계를 보여준다. 머리로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책을 읽으면 범인들이 구상을 실제로 옮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우월함의 증거였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외로움의 근원이었다는 말이 찝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것이 먼저다. 누구에게 얼마큼의 책임이 있는지 알 수 있고, 책임을 물어야 피해를 보상받고, 떠난 사람들을 제대로 추모하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학살의 징조를 미리 알아차렸다는 증거를 여러 차례 은폐하고, 심지어 인멸하기까지 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진실을 향한 지난한 싸움을 계속했다. 진실을 알고 싶은 것은 가해자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자신의 책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문에 고통받아야 했다. 범인 중 한 명인 딜런의 어머니는 후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썼다. 


떠난 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는 '왜'를 알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건을 극복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왜'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어떻게'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래서 이제, 어떻게'라는 남은 사람들의 과제를 두 범인의 이야기와 동등한 비중으로 다룬다. 


아이러니하다. 범행 준비 과정과 생존자와 그 가족들의 분투가 교차로 등장하기 때문에,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는 참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동시에 사건의 영향력으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면면과 마주친다. 미래를 향한 노력을 살펴보는 동시에 사건의 심연으로 접근하는 기차에 올라탄 느낌이 묘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주어진 상황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마음에 박힌다. 현장에서 남편의 유품과 빠진 이를 챙겨 온 부인, 사건 이후 우울증으로 결국 세상을 저버린 어머니를 마음으로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생존자, 그리고 "총격자들 때문에 남은 인생이 정해지지 않았다"라고 얘기한 패트릭. 이미 벌어진 일에 메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걸어 나가겠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다.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가는 책의 구성 방식 덕분에 그 용기가 더욱 빛난다. 우월감과 파괴욕에 사로잡힌 범인들은 마침내 살상 계획을 현실화하고야 말지만, 여기, 사건에 발목 잡히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희망들이 있다.


사건 5주기를 기념할 때 생각보다 모인 사람이 적었고, 관계자들은 오히려 이 사실을 기뻐했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10주년을 맞고, 20주년을 맞을 때는 아무도 모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사건을 완전히 극복했음을 상징한다는 것. 그러고 보면 어떤 보상보다도 남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시간일 테다.  


한 참사를 직면한 사회의 대응능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며 개인의 용기를 되새겨 보기 좋은 책이다. 




 


***다음에 읽어야 할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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