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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Nov 28. 2020

읽그 46.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아르테



예의와 윤리는 다르다. 예의는 맥락에 좌우된다. 윤리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한다. 나에게 옳은 것이 너에게도 옳은 것이어야 하며, 그때 옳았던 것은 지금도 옳아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괜찮은 것이 너에게는 무례할 수도 있고, 한 장소에서는 문제없는 일이 다른 시공간에서는 모욕이 될 수도 있다. (p.49)



작가는 2017년부터 <책, 이게 뭐라고?!>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했다. 시즌 2를 끝으로 하차한 다음 팟캐스트와 관련된 글을 책으로 묶었다. 직접 에피소드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장강명 작가와 요조가 함께 팟캐스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간 만난 사람과 책에 대해 썼다는 소개를 읽고 역시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글이 좋기도 하지만 어떤 일이든 글로 술술 써버린다는 데 감탄했다. 신혼여행에 대한 에세이로 책 한 권을 뚝딱 쓴 작가 아닌가. 그 책은 한창 작가가 쓴 소설과 소설 사이를 떠돌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재밌게 읽었다.


'읽고 쓰는 사람'에서 '말하는 사람'의 옷을 걸쳐 입었던 소설가의 도전기. 작가는 자신의 본분, 즉 읽고 쓰는 일과 말하는 일 사이에서 느끼는 간극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 라는 이야기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들이 피톤치드처럼 뿜어내는 희망을 찾았다. 이런 구절들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작업 전반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이 참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즉, 내게 일관된 주제가 있다는 사실은 내가 지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보장을 해주지는 못해도 그에 대한 희망은 품게 한다." (p.243)


그러나 책을 닫고 난 후 계속 머리에 남는 것은 서두에 인용한 부분이다. 나에게는 괜찮은 것이 너에게는 무례할 수도 있고, 한 장소에서는 문제없는 일이 다른 시공간에서는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말.


감수성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드높다고 느낀다. 개인이 느낀 불편함을 그 사람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말자는 설득이나 누구도 차별받거나 상처 받지 않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을 발견하면 우선 반갑다. 경험이 쌓인다고 꼭 이해의 폭이 넓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으니까.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보자고 일깨워주는 주장은 비타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자주 섭취하면 좋다.


그러나 누구도 상처 받지 않은 세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존중하는 것과 그 가치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다르다. 모두가 상처 받지 않는 세상을 그려내는 손길은 사랑스럽지만, 그건 불가능한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상처 받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무용한 노력이라고 지레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세상을 실현하려는 주인공이 있으면 그냥 응원해주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목표더라도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뒤로 후퇴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착한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콘텐츠의 가치가 더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가끔은 피곤함을 느낀다. 일단 나부터가 그렇다. 방심하지 않으면 내가 겪은 문제를 고민 없이 윤리의 차원으로 돌려버린다. 하지만 작가가 책에 이어서 쓴 것처럼 발화 상황에는 언어 외에도 비언어적인 요소가 있다. 표정이나 말투로 우리는 더 많은 뉘앙스를 파악한다. 그런 신호들은 문화적 맥락에서 작동한다. 신호를 보내는 것도 해석하는 일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맥락과 상황에 얽힌 예의의 문제를 보편적인 법칙, 윤리로 만들려고 할 때 충돌이 발생하곤 한다. 예의 없는 행동에 함께 분노할 수도 있고, 내가 느낀 불편을 공공의 어젠다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는, 어떤 초월적인 기준을 만드는 건 다른 문제다. 많은 경우 상황이 생략되거나, 덜 중요한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편한 사이더라도, 아무리 상대와 허물없이 친한 사이더라도, 아무리 옛날 사람이더라도. 맞다. 이런 이유가 무례함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감수성에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무례한 태도에 상처 받은 사람에게 역시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공감과 위로는 힘이 된다. 다만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가끔 생각하고 싶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 가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 둔갑하는 경향에 대하여.


타인과 어울려 살기 위해 감수성을 더 길러야 한다.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무례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내가 느낀 불쾌감을 윤리의 레벨에 연결 짓는 데도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말을 떼어와서 공론장에 쉽게 세우고 싶지 않다. 절대적인 자로 재단하고 올바름의 등급을 매기고 싶지 않다. 함께 느끼는 분위기, 표정과 기색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그러니 대화중에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는 것만 무례한 일일까. 머릿속 공간에서 말의 절대적인 무게를 재는데 바빠 상대가 전하려는 마음에 무심해지는 것도 무례한 것은 아닐까.


아무리 살아온 환경이 그렇다 해도, 상황은 차치하고, 상황은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런 말을 입에 올리는 날이 대다수라면, 아주 가끔 마음에 제동을 걸고 싶어 진다. 그런데, 이해하려고 노력해본 건 맞나, 한 번이라도. 현실에선 늘 그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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