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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Dec 13. 2020

읽그 48. <아무튼, 서재>

김윤관 / 제철소



하루에 새로운 장소를 한 곳 이상 발굴하자는 목표를 세운 적이 있었다. 도로를 달리고 강을 건너가야 있는 근사한 장소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카페, 복합문화공간, 서점, 편집숍 외에 그곳에 있는 줄 몰랐던 반찬 가게의 간판 하나를 발견하는 것도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쳤다. 매일 지나가면서도 지나치는 곳을 발견하는 것,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풍경을 발굴하자는 다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소유보다는 경험이라는 생각을 실천하는 소소한 방법이었다. 보지 못했던 장소와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동 원칙이었고, 생활의 원동력이 됐다. 도시 생활자로서 내가 사는 도시를 바지런하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반경으로 따지자면 넓지 않은 범위였지만,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다 보면 내 세계도 함께 넓어지고 깊어질 것 같았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반강제적으로 늘면서, 이제 한 공간의 밀도를 높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쁘게 시선을 돌렸던 건 새로운 풍경을 발굴하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풍경을 발굴하고 싶었던 건 내가 좀 더 덜 지루한 인간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공간에서도 내 시각을 계속 업데이트할 수 있다면, 집콕 생활이라고 해서 단조로워질 리 없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한 기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공간에 투자하는 걸 아깝게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 잦은 이사를 경험하며 홈 인테리어니 리빙 용품이니 짐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인생의 무게를 체감하고 싶다면 이사를 추천한다. 뭐든 겪어봐야 아는 나는 절대 짐을 늘리지 말자며, 어느새 공수래공수거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자고 돌아올 캠핑을 가더라도 장비를 챙기는데, 챙길 때는 귀찮았던 것들이 막상 도착하면 빛을 발하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데, 무슨 메멘토 모리처럼 이삿날을 매번 엄숙히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무 좋아서 나가기 싫은 공간을 목표 삼을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지긋지긋해서 뛰쳐나갈 정도로 공간을 방치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본가에 돌아와 내 방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든 생각이다. 역시 또 겪고 나서 깨달았어.


유년시절의 추억을 끌어당기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가끔 얼마나 견디지 힘든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주인이 머무르지 않을 예정이던 내 방은 당연히 이 집에서 가장 작다. 나와 관련된 물건들을 몰아놓는 용도로만 쓰였기 때문이다. 오래된 조각상, 초등학생 때 받은 상패, 고등학교 시절 사진(공포의 컬러테). 추억의 물건은 가끔 마음이 동했을 때 꺼내보면 좋지만, 일상 위에 무질서하게 펼쳐두면 그저 어수선해 보일 뿐이다.


잡다한 물건들이 함께 모여 있기에 이 방은 박물관 창고 같기도 하다. (아, 버리기는 그러니까 저 방에 두자.) 키워드가 정해져 있지만, 박물관 안에서 제일 인기가 없는 섹션이거나. (시간도 없는데 저긴 스킵하자.) 오래된 물건의 영향력에서 좀 벗어나 내가 머무르고 싶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 요즘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책상 위는 일단 마음대로 정돈했으니 이제 방의 나머지 부분에도 손길이 필요하다.


명창정궤. '햇빛이 잘 비치는 창 아래 놓여 있는 깨끗한 책상'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서재>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서재였던 사랑방이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이었다고 한다. 선비들이 경전을 공부하고 나랏일을 고민하던 것은 물론, 시와 글씨, 그림을 수련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했던 곳이었다.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자신만의 서재라고 힘주어 말한다. 생각대로 살기 위한 첫걸음은 그런 공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머무르는 방이자 서재도 복합문화공간이다. 일하고,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식물을 기르고, 홈트레이닝을 하는 곳. 가끔 가족들과의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하는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소. 이 글을 마치면 장바구니에 담아둔 조명을 결제하러 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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