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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May 11. 2020

읽그 07.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 반비


16년 동안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인 딜런의 어머니이자, 이 책의 저자인 수 클리볼드의 고백이다. 그 아이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아들이다. 다니던 학교에 총과 폭탄을 가져가 다른 학생과 선생님을 죽거나 다치게 하고 스스로 사건 현장에서 목숨을 끊었다. 그날 어머니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심연 속으로, 피할 도리도 없이 떨어진다.


숨 쉬고 웃던 아들은 죽었고, 어머니가 알던 아들의 모습도 죽었다. 왜 우리 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머니는 끊임없이 되묻는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아들이 범인임이 확실해진 다음에도 타인의 강압으로 사건에 말려들었다는 등의 어떤 가능성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아들과 아들의 친구, 두 공범이 찍은 일명 지하실 비디오를 확인한 다음 그는 비로소 믿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인다. 유치한 우월의식을 드러내며 대량살상계획을 떠들어대는 아들은, 이 끔찍한 일을 주도적으로 계획한 괴물이었다.


자식의 허물에 대한 책임은 그 부모에게로 쉽게 돌아오곤 한다. 수와 남편 톰은 하루아침에 괴물을 길러낸 살인범의 부모가 되었다. 사람들의 비난과 적대감이 세상을 떠난 아들 대신 그 부모에게 쏟아졌다. 그 분노와 책망의 화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순간에도 수 역시 같은 질문으로 괴로워한다. 왜 아들은 괴물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 질문은 그 자신을 겨냥한 책망이 되었다.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이었다. 가정 내의 학대와 방임은 없었다. 무엇보다 수 자신이 장애 학생들을 위해 일했으며, 평소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사려 깊게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수가 아는 아들의 모습 역시 테러리스트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앗아간, 자신들의 계획을 자랑스럽게 떠벌렸던 살인자는 자신이 알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는 지나간 추억을 낱낱이 되새기며 자신의 양육방식에 허점이나 문제가 있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들이 끔찍한 결말로 치달을 때까지 자신이 놓친 신호는 없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여러 경험과 전문가들의 만남을 통해, 수는 아들의 행동 동기라는 막연한 퍼즐을 맞춰나간다. 이미 아들이 세상을 떠난 이상 그 작업은 추측 이상이 될 수 없다.  


환경이나 본성 모두 절대적인 원인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수가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사소하게 넘겼던 위험 징후와 이들이 의미하는 바는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들의 살인이 자살로 가는 길이었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다. 딜런은 그의 죽음 뒤에 발견된 메모와 글을 통해 수없이 자살 욕구를 표현했다. 전문가들은 범인들이 남긴 기록을 분석해 수의 아들 딜런은 우울증 환자였으며 공범 에릭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소위 사이코패스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가학적 성향이 높았던 에릭의 폭력과 실행력이 없었던 딜런의 비관이 시너지 효과를 낸 셈이다. 


에릭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딜런은 생을 스스로 마감했을지 모른다. 딜런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에릭은 다른 가담자를 구해 비슷한 사건을 일으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벌어진 일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을 거라고 수는 생각한다.


수는 아들의 죽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아들과 비슷한 문제로 고통받는 청소년들이 미국 전역에 있음을 깨닫는다. 우울증 등 정신 문제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넘쳐났다. 딜런이 일상적으로 겪었던 것 그 이상으로, 괴롭힘 때문에 지옥 같은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뇌관과 같았다. 실제로 학교에서 총기 사건을 일으킨 아이들은 높은 비율로 정신적 문제를 경험했고, 콜럼바인의 범인인 에릭과 딜런을 자신들에게 영감을 준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러나 수는 건강하지 못한 정신 상태, 폭력을 묵인하는 미국 고등학교의 분위기 또는 공범인 에릭을 언급하며 아들의 면죄부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을 긋는다. 수는 아들을 잃은 상실의 고통과 아들이 만들어낸 상실의 고통, 즉 아이가 누군가의 미래와 행복을 파괴했다는 고통으로 함께 아파한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아들이 타인에게 안겨준 고통이 얼마나 막대한 것인지 재차 깨닫는다. 


용서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자신의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뎌내는 고행. 이 과정을 거치면서 수는 비통과 잔악한 범죄에 대한 혐오를 차례로 경험한다. 이는 진정한 애도로 접어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살인자의 어머니는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다. 수는 제발 자녀들이 살아돌아오길 기도하는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 달리, 아들이 빨리 스스로 생을 마감해 죄를 덜 지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했다. 자신이 낳았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식이 왜 그런 결론을 택했는지 알아가는 노력은 어머니만의 고독한 싸움이다. 아들을 애도할 수 있기 위해서, 세상에 슬픔을 안겨준 데 사죄하기 위해서, 비슷한 일이 또 발생하지 않도록 작은 도움이나마 보태기 위해서. 


수는 결국 사랑이 남았다고 고백한다. 눈병이 난 어머니를 위해 다정한 편지를 남긴 아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통행량이 많은 학생식당에 가장 큰 폭탄을 설치한 아이. 결코 통합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모습 모두 자신의 아들이다. 수는 어떤 사람이 삶의 마지막에 저질렀던 끔찍한 일만으로 그의 생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양 극단에 위치한 모습을 똑바로 바라본다.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며 추모와 속죄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딜런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이었겠지만,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수의 말이 뇌리에 박혔다. 그 또한 처음에는 아들을 낳지 않았다면, 아니 아이들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하곤 했단다. 그러나 사그라들지 않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준 기쁨이 인생에서 가장 컸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는 자신의 슬픔과 세상의 슬픔을 구분하며, 벌어진 일에 용서를 구하는 대신 또 다른 잠재적인 파괴와 살상을 막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과 나눈다. 


치열한 분투의 기록을 읽고 있으니 생존자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수가 스스로 구렁텅이에 떨어지기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용기를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의 의지였다. 가해자나 가해자의 가족에게는 생존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그 슬픔에서 도망가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또 어떤 표현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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