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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Sep 05. 2020

읽그 35.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 문예출판사


히틀러와 같은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독살의 위협을 느끼는 늑대(히틀러의 별명이었다)는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자신의 음식을 미리 맛보는 여자들은 단지 10개의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들은 히틀러와 같은 음식을 먹고 소화시켰으며 배출했다.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히틀러의 시식가가 된 여자들. 이탈리아인인 작가 로셀라 포스토리노는 어떻게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을까. 그는 2014년 어느 날 독일인 마고 뵐크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었다. 마고 뵐크는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하던 여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평생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다가 96세가 되었을 때 세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고 뵐크가 세상을 떠나면서 작가의 인터뷰 요청은 좌절됐다. 대신 작가는 자신을 사로잡은 이 이야기를 소설로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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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개인 동부전선 지휘본부, 즉 볼프스샨체(‘늑대소굴’이라는 뜻). 이곳에서 주인공 로자와 나머지 여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히틀러의 시식가로 일했다. 모두가 궁핍한 전시 중에 호화로운 음식을 맛보지만, 죽음의 공포에서 놓여날 수 없다. 책의 첫 장면부터 강렬하다. 10명의 여자가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식당에서 히틀러의 전속 요리사가 재주를 뽐낸 음식을 먹는다. 공포감과 허기는 서로 몸집을 키운다. 여자들은 뚜렷한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진단 시험지다. 목숨은 종잇장과 같고, 위기의 순간에 그들을 지켜줄 사람은 없다. 나치는 월급 명목으로 돈을 지급하며 그들의 생명까지 사들인다.


히틀러의 시식가들은 당시 독일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시식자들은 독살의 위험 속에서 일하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편에 서서 일하는 공모자다. 원치 않게 차출되었든, 생계를 위해 그 일을 그만둘 수가 없든 결국은 체제의 안위를 위해 협력하고 있는 셈이다.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양면성은 등장인물 모두에게 존재한다. 히틀러에게 맹목적인 충성심과 환상을 갖고 있는 인물도 있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해낼 따름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인물도 있다. 후자는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은 그저 임무를 수행했을 뿐, 자신의 일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아이히만처럼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타인의 불행을 가져오는 데 협조했다.


책에서 묘사된 히틀러 또한 양면적인 인물이다. 수백만 유대인의 생명을 앗아간 그는 도축이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채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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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멈췄다면 이 작품은 나치 독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소설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독이 든 음식이 놓일 수도 있는 식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그 자체다. 내 앞에 있는 음식이 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로자의 어머니의 말처럼 음식을 먹는 것은 ‘죽음에 대항하는 행위’이지만 ‘생존을 위한 모든 행위는 결국 인간을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킨다’. 삶은 위험한 것이며 위험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는 믿음은 로자의 남편 그레고어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레고어는 그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크라우젠도르프의 병영에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은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이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위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p.89)


식욕은 곧 삶에 대한 욕구다. 식탁 앞의 여자들이 허기와 공포, 공포에서 비롯한 허기와 허기에서 비롯한 공포를 느끼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로자는 삶에서 유일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존하는 법뿐이었다고 고백한다. 알 수 없는 위험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우선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다. 생명을 부지하는 것조차 힘든 시절에 살만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자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굴욕과 억압 외에도 자신이 타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나는 그리움의 대상이 없는 향수병을 앓았다. 그레고어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나는 삶이 그리웠다. (p.159)


같은 처지라 하더라도 동지애가 쉽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나도 잊고 싶은 아픈 과거를 알고 있을 때는 오히려 상대를 멀리하는 것이 기꺼운 일이기도 하다. 내 약한 점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식가로 일하는 여자들 사이에는 애초에 끈끈한 연대가 없었다. 같은 공간에서 죽음의 공포를 함께 견뎌냈다는 연약한  유대의식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계기들이 생겨난다. 히틀러를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여자들과 그렇지 않은 여자들은 물과 기름 같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섞이지 못한다 해도 이들이 함께 하며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다 함께 웃는 일 같은 것. 또 히틀러의 추종자인 시식자 테오도라가 화상을 입은 로자의 팔에 생감자를 올려준 일.


어쨌든 이 책에서 로자에게 사랑과 상처에 대해 처절하게 알려준 중심 인간관계는 크게 3가지라고 생각한다. 전장으로 떠난 남편 그레고어와 속을 알 수 없었던 동료 엘프리데, 그리고 로자가 사랑에 빠지는 나치 치글러 중위. 로자가 느끼는 감정과 내면 갈등이 이야기 전개와 잘 어우러져 있어 정말 살아있는 한 인간을 보는 느낌이 든다. 로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으며 어쩔 수 없는 자책에 시달린다. 그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기 때문에 쉽게 연민과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는 결론으로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작중 상황은 너무 비상식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주 먼 미래에는 또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알지 못하는 위험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연민과 사랑이 아니라면 또 우리에겐 무엇이. 이 생각이 들게 한다. 아주 좋은 소설이다.



+

며칠 전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조조 래빗>을 봤다.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었다. 자신이 진정한 나치라고 믿는 어린 소년 조조 베츨러가 주인공이다. 조조의 가장 친한 친구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아돌프 히틀러의 분신이다. ‘토르:라그나로크(2017)’를 연출했던 와이티티 감독의 작품으로 감독 본인이 히틀러를 연기한다. 나치의 만행을 너무 희화화한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폴리네시아계 유대인이 히틀러 역할을 맡는 것만큼 히틀러를 제대로 모욕할 수 있는 길이 또 어디에 있을까’라고 답했단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난 다음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한 달 전쯤 이 책을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올려두었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인류의 흑역사>에서 히틀러가 대중 선동 능력을 겸비한 무능력자였다는 대목을 읽었고, 영화 <조조 래빗>에서 본 우스꽝스러운 연기의 잔영이 아직 남아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겠다는  막연한 끌림에 책장을 펼칠 구체적인 동기가 생겼다. 요즘 게을러져서 그런 것인지, 타성에 젖은 것인지 이런 불씨가 없으면 처음 본 작가의 작품을 바로 읽기가 쉽지 않다. 신중해진 것일까.



- 밑줄긋기


내 유년시절은 베개 아래 쌓아둔 책들이자 아버지와 함께 부르던 전래동요이자 광장에서 하던 술래잡기 놀이이자 크리스마스에 먹는 슈톨렌 케이크이자 동물원 소풍이었다. (p.49)




(유년시절을 묘사하는 구절들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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