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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Dec 27. 2020

읽그 50. <하틀랜드>

세라 스마시 지음 / 반비




모두가 '그렇다'라고 말할 때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침묵은 때때로 자신의 몸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상황의 반전을 기다리며 속으로는 절대 저들에게 동의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어느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저들이 정말 맞는 것은 아닐까. 혹 틀린 것은 내 생각이 아닐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의 경멸을 가난한 사람은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에 대한 경멸로 내면화하지. (p.200)


대중매체와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준점을 세우고 가치의 우열을 매긴다. 그 모든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가끔은 나 자신을 오롯이 지키기 위한 내면의 단호함이 필요하다. 세상의 목소리가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부당하게 폄하할 때다. 지속적으로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낼 때, 내 가치를 깎아내리고, 나아가 존재 가치를 부정할 때다.


책 <하틀랜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달려온 한 여성의 연대기다. 캔자스 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한 저자는 가족의 역사를 통해 미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족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가난한 백인 계층에 대한 세상의 시선, 나아가 출신 지역인 캔자스 주가 미국 사회에서 지니는 함의다.


책이 말하는 것처럼 빈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누구나 가진 물질에 상관없이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에 시달릴 수 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자본주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에서 수치심과 직결된 빈곤은 경제적 빈곤이다. 개인이 노력과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나라에서 물질적으로 빈궁한 사람들은 경제적 불편에 더해 삶의 태도를 의심하는 눈초리에 노출된다. 사회는 그들의 불성실함과 게으름을 비난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시선을 내면화해 죄의식을 느낀다.


풍요하기로 이름난 나라에서 가난을 겪는다는 건 가지지 못한 것을 끝없이 자각하며 사는 것과 마찬가지야. 무더운 날 마실 수 없는 차가운 저수지 옆에서 마라톤을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안전한 기반이라고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원뿌리까지 내려가고 물질적 부가 나를 건드리지 못할 곳까지 계속 더 내려갔어. 그곳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지. 네 목소리였어. (p.405)


저자가 발견한 '너'는 태어날 수도 있었으나 결국 태어나지 못했던 자신의 아이다. 대대로 내려온 빈곤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저자는 악순환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방법은 바로 10대 임신과 출산, 중독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존재를 축소하는 미국 사회의 시선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다. 아이가 너무도 소중하기에, 자신이 경험한 것과 같은 환경을 물려줄 수는 없다고.


그 아이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존재한 적은 없었으나 그의 전부였다. 안될 거라고, 너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그를 지지해준 유일한 목소리이자 수호천사로 존재했다. 보이지 않기에 가장 성스럽고 귀한 아이. 책은 태어날 수 없었던 이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안정된 생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저자는 드디어 아이에게 완전한 이별을 고한다. 악순환의 고리에 확실한 매듭이 지어진 순간이었다.


가장 내밀한 고백은 이렇게 전체적인 구조를 들여다보게 한다. 개인적인 글이 사회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브런치에 올라온 글을 읽으며 때때로 마음이 울렸던 것도, 나도 글을 써봐야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돌아보면 비슷한 이유였다. 올해 마지막 읽그를 이 책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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