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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Jun 13. 2020

읽그 14. <쇼코의 미소>

최은영 / 문학동네


어딘가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기 민망한 것들이 있다. 물리적인 증거가 부족한 것, 나는 내심 굳게 믿고 있지만 상대에게 들이밀 근거가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는 것. 예를 들어 어딘가에 내 자리가 있으리라는 것,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으리라는 것. 때로는 입 밖으로 꺼내면 한없이 유치하게 들리는 것. 상대가 그 말을 꺼낸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보거나 가르치려고 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 내 속에선 뿌리 깊은 신념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흩날리는 비눗방울 같아 말의 무게와 가치를 훼손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 예를 들면, 희망 같은 것.


희망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왠지 그것을 알리는 것은 내 몫이 아닌 것 같다. 가볍지도 엄숙하지도 않게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쇼코의 미소>를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또 위로를 받았다.


끊어질 것 같지만 계속 이어지는 인연도 있고, 늘 함께 할 것 같았지만 죽음으로 단절되는 관계도 있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경험한다. 소설에서 전자의 관계는 쇼코와 주인공인 소유의 관계일 것이고, 후자의 관계는 소유와 소유의 할아버지의 관계다.


자매결연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온 쇼코는 소유의 집에서 일주일 간 머무른다. 소유는 무뚝뚝한 엄마와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처럼 구는 것을 보며 혼란을 느낀다. 자신이 아는 가족들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쇼코에게 자신을 ‘미스터 킴’으로 부르라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쇼코는 할아버지와는 일본어로, 나와는 영어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소유는 가끔 쇼코를 떠올린다.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쇼코. 소유가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고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고 결심하게 된 데는 쇼코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섞여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대학교 마지막 학년, 쇼코를 만나러 일본으로 찾아갔을 때 우울에 잠식된 그의 모습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소유는 자신이 쇼코보다 더 힘이 세졌다는 것을 자각하고, 일종의 우월감을 느낀다. 소유가 쇼코의 위치를 마음속에서 재정립하는 것을 보고, 어쩌면 쇼코는 소유의 지향점에 가까운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유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쇼코는 떨어져 있더라도 소유에게 영감과 의지를 줬을 것이다. 어떤 우정은 연애와 같다는 책 속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가 그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소유의 상대적인 유능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이 서른을 앞둔 소유는 무수한 지망생 중 한 명이 되었다. 단편영화를 찍었고 계속 시나리오를 쓰지만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은 죽은 지 오래다. 단지 과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미 없이 버틴다. ‘현실적인 조건’을 찾아 취업하고 결혼한 친구들을 마음속으로 단죄하며, 소유는 자신의 허영을 깨닫는다. 영광은 재능 있는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단지 원하는 지점에 닿지 못했다는 것이 슬픈 게 아니다. 내부의 동력이 소진되었음을, 애초에 순수한 동력이 없었음을 깨달은 게 문제였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을 때, 할아버지가 소유를 찾는다. 생전 처음 손녀의 자취방을 찾아온 할아버지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 너 그렇게 사는 게 멋지다고 얘기한다. 소유는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표정을 숨기는 데 능하지 못한 사람의 측은함을 읽는다. 할아버지는 비가 내리지만 손녀가 주는 우산도 마다하고 비를 맞으며 돌아간다. 우산이 고장 난 것 같다며 낑낑대는 손녀의 손에서 우산을 건네받아 펴주고 나서.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창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p.40)




뒷모습이 가끔 더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한 사람의 진심은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렇게 할아버지를 돌려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유는 할아버지의 투병 소식을 전해 듣는다. 소유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벌써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소유는 집으로 내려가 엄마, 할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잘 때는 소유를 중간에 두고 엄마와 할아버지가 양쪽으로 누워 잔다. 잠들기 전까지 가족의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할아버지는 보내고 소유는 영화 일에 미련을 버린다. 다시 연락이 닿은 쇼코를 만나 소유가 일본을 찾았을 당시 사실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것을 듣고, 할아버지와 쇼코가 주고받은 편지를 함께 읽는다.


상대와 거리가 있을 때는 각종 단서를 조합해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타인의 마음이 추측의 영역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 대표적으로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소유의 고백을 보자. 그는 할아버지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사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져도 할아버지의 인생 중 5분의 3을 모른다. 나이가 어린 쪽이 부모나 조부모의 삶을 가늠하기 힘들듯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설사 누군가와 24시간 동안 함께 있어도 다른 꿈을 꾸는 게 사람이다. 타인의 마음과 삶은 앎의 영역이 아니라 이해의 영역이다.


우리 사이의 차이를 넘어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소유가 언어도 국적도 다른 쇼코의 미소를 처음 보고 거리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예의 바르면서도 차가운 미소. 일본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이자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 쇼코가 우울증으로 약해진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속사정을 알아내려 노력하는 대신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상대의 사정을 궁금해하기보다 자신의 처지와 기대를 투영한다. 물론 소유의 마음도 짐작할 수 있다. 희망찬 미래를 발견하고 전진할 준비가 된 사람은 타인의 우울에 닿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치 감염될 것을 겁내는 것처럼.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소유가 껍데기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소유가 소원했고 섭섭함도 느꼈던 쇼코와 화해하고 난 다음에는 어땠을까. (이다음에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 작품의 마지막 대목이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대해 서술한 구절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


출국장에서 나를 바라보며 짓는 쇼코의 미소에 소유는 다시 서늘함을 느낀다. 예의 바르지만 차가운 미소. 상대와 나 사이에 벽이 있다는 것을, 그 벽 너머를 바라보고 손을 내밀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우선 상대가 완전한 타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다. (사실 저 표현에 당황했다. 나는 쉽게 무장해제되고, 적어도 얼굴을 보는 순간에는 상대와 나 사이에 벽(이 있더라도)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성격 때문에라도 상대가 나와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내게 보여주는 모습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제멋대로인데다가 충동적인 할아버지. 위에서 인용한 부분을 읽으며 먹먹해졌다가, 갑자기 제멋대로이고 충동적인 나를 만나주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제멋대로이고 충동적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으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애정으로 지켜봐 주었으면. 함께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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