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요가에 빠져 있다.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슬슬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일요일 오후 4시에 난 요가원엘 간다. 나에게 요가란 마치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라는 주문 혹은 의식과도 같다. 좁디좁은 요가매트 위에선 오롯이 내가 이 세계의 중심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몸이 뻣뻣하기 그지없어 쉬운 동작도 제대로 완성 못 할 때가 부지기수다. 시작한 지 다섯 달 째인데 아직도 레벨 0 왕초보반 수업을 듣는다. 말이 레벨 0이지,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어려운 아사나(Asana, 요가 자세)를 척척 수행하는 것을 보며 초반엔 잠시 주눅도 들었지만 '마이웨이'로 일관하기로 했다. 사람마다 타고난 몸이 다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면 어제보다 손을 1mm씩은 더 뻗을 수 있겠지, 달팽이 걸음만큼의 진보라도 있겠지.
시르사아사나(Shirsasana, 머리 서기), 우르드바 다누라아사나(Urdhva Dhanurasana, 누운활자세)같이 어려운 동작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버둥거려봐도 쉽지 않지만 뭐 어때. 사바아사나(Shavasana, 송장자세)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 나는 어쩌면 모든 것을 송장처럼 내려놓기 위해 1시간 30분의 수련을 감내하는지도 모르겠다.
요가 전후로 마시는 꿀 같은 차, 사바아사나에서 현생으로 돌아오게 하는 싱잉볼, 저녁 수련을 한 어느 날.
수련 초반 명상 10분 이상, 후반 사바아사나도 10분 이상 충분히 시간을 준다는 점에 끌려 이 요가원에 정규 수련자 등록을 했다. 운동이나 다이어트 목적이 아닌 '내 마음 보듬어주기'를 할 수 있는 요가원을 찾아 헤맸는데, 그에 상당히 부합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굉장히 매력적인 포인트는 수련 전후 찻자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아직 한기가 남아있던 계절엔 뜨끈한 보이숙차를, 요즘 같은 한여름엔 얼음 동동 띄운 백차를 마시며 수련을 마무리한다. '오늘은 선생님이 어떤 차를 내어주시려나.' 나는 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사이비 요기니(Yogini, 요가하는 여자)다.
남편 말에 의하면 나는 마시는 행위에 도가 텄다. 술을 마시면서도 이 술에서 어떤 향과 맛이 나는지 분석하는 것을 상당히 즐기는데, 와인을 배운 것도 내가 받은 느낌을 더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요가원에서 차를 마시면서 '젖은 흙내가 느껴지네', '해조류 향이 나는 차도 있군' 따위의 미각적 자극을 받으면서 차에 관심이 생겼다.
볼때마다 탐이 나는 다기와 차들.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 들어서면서 찻자리가 중단됐다. 차 마시는 재미가 요가 다니는 이유의 3할쯤은 되는데, 이렇게 아쉬울 데가. 이참에 다기를 들이고 내 차 취향이 뭔지 알아볼 수 있도록 차 샘플러 몇 가지를 사봤다. 개완에 찻잎을 넣고 차가 우러나길 기다렸다가 공도배에 붓고 찻잔에 따라 한 모금. 또 물을 부었다 기다리고 공도배에 붓고 다음 차를 기다리고. 이 단순한 사부작거림을 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머리를 텅 비우게 된다. 요가 선생님이 명상을 할 때는 아무 생각도 말고 그저 나 자신에 집중하라는데 도통 안 되더니 차를 우리는 과정에선 머릿속이 쉽게 비워져서 놀랐다. 요가와 차, 명상 이 세 가지의 연결고리가 끼워 맞춰지는 느낌을 받는 요즘이다.
아침에 업무를 시작하기 전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서 출근하거나 캡슐 커피를 내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최근엔 기상 시간을 30분 당겨 차를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다. 무언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겨를 없이 결과물을 쏟아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피로가 쌓인 상태다. 차를 우리는 과정이 나에겐 영감을 불러오는 일종의 '고귀한 게으름'이다.
개완과 공도배, 차쟁반, 차 샘플러를 구비했다.
"차에 취미를 붙이면 술을 좀 덜 마시게 될까?"
"아니? 너는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실 거 같은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다른 것을 마시면 술을 좀 줄이게 될까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아무리 술을 즐긴다지만, 그래서 알콜로드까지 연재한다지만 향과 맛도 즐기지 못하고 폭음을 한다거나 잦은 음주로 건강을 해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죽기 전날까지도 와인 반 병(한 병 마실 체력이 있으면 더 좋고)을 즐기다 자는 것처럼 눈 감는 게 내 체력 관리의 목표니까.
애석하게도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실 거라던 친구의 말은 대체로 맞았다. 요샌 아침에 차를 마시고 저녁엔 술을 마신다. 수색이 붉고 짙은 차를 마시면 열이 훅 올라 백차를 즐기고 있다. 여름에 레드와인은 덜 당기고 화이트와인에만 손이 가는 원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러 샘플차 중 백차의 일종인 '월광백(月光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모든 월광백이 다 백차는 아니라는데, 내가 산 공부차의 13년 월광백은 백차로 만들었다). 단맛이 돌고 부드러워서 편하게 술술 마시기 좋다. 달빛에 찻잎이 하얗게 반사돼 월광백이라고 부른다고도, 달빛에 말린 차라 월광백이라고도 한다는데 어느 게 맞는지 아님 둘 다 마케팅일 뿐인지는 모르겠다.
따뜻하게 마셔도 좋고, 얼음 위에 부어 급랭 아이스티로 마셔도 잘 어울린다. 물배는 찼고, 아직 몇 번 더 우러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버리긴 아까울 땐 차를 우려놨다가 냉장고에 보관하고 운동 후 시원하게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보관한 차들은 상당한 경우의 수로 칵테일이 된다.
차게 식힌 월광백 150ml에 동량의 소주, 황설탕 밥숟가락으로 담뿍 1개, 라임즙 휘휘 세 바퀴 반, 각얼음 대여섯 개를 보냉 텀블러에 넣고 칵테일 셰이커처럼 흔들어댄다. 칵테일 베이스로 비싼 술을 쓰지 않아도 차가 가진 맛과 향이 완성도를 한껏 높여준다. 7~8년 전쯤 한 달에 두세 번은 드나들었던 이태원의 멕시칸 음식점 바토스(VATOS)에서 '텍사스 티(Texas Tea)'라는 칵테일을 파는데, 언뜻 그와 비슷한 맛을 내서 이 우연한 발견에 소리를 질렀다.
난 요새 요가를 하며 차를 마신다. 그리고 술도 마신다. 아침엔 월광백을, 밤엔 내 맘대로 이름 붙인 칵테일 Seoul Moonlight white tea를.
차게 식힌 백차와 소주, 황설탕, 라임즙으로 만든 내 멋대로 칵테일 Seoul Moonlight white t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