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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Aug 04. 2017

쓰다 - 몸에 새기다

어라운드 x 브런치 '쓰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쓰다'라는 동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난 쓴다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유독 좋아했던 나를 위해 엄마는 글짓기 과외를 알아봐 주셨고 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매주마다 선생님과 독후감이며 논설문 등을 쓰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으로 작은 수첩에 노래 가사들을 끄적여댔었다. 음대에 가서는 글쓰기보다는 나의 감정이나 마음들을 곡으로 써서 혼자 연주하고는 했었다.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못하고 작은 연습실에서 혼자 피아노로 치곤 했었다. 이제는 브런치에 소소하게나마 글을 쓰면서 나를 표현하고자 하지만 아직 발행하지 못하고 작가의 서랍에만 묵혀둔 글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일주일 전,  오른쪽 손목에 단어를 쓰고 새겼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았다. 아빠가 데려오신 작은 강아지도 난 무서워했었다. 특히 내 앞에서 사촌언니의 손을 물어버렸을 때 이후로는 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강아지 때문에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깜짝깜짝 잘 놀라기도 하고 성격이 워낙 예민한 탓인지는 몰라도 세상에 겁이 많았다. 병원에 가서 주사 맞는 것도 무서워했었고 자주 체하는 체질 탓에 손가락을 따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그 때마다 바늘이 어찌나 무섭던지. 


그로 인해 망설였었다. 예전부터 몸에 무언가를 새긴다는 것이 멋있어 보였고 특별해 보였다. 무언가를 몸에 새기고 평생 지니고 다닌다는 것이 큰 의미를 담지 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나에게 그런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있나? 생각해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요리사인 여자는 어떤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몸에 허브를 하나씩 새긴다고 했다.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나면 그때는 지금보다는 잘 seasoned 되어있을 거라고, 그 나중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너그러워지기도 했고 조그만 미니타투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그렇다고 그냥 귀여운 문양, 예쁘다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정말 평생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 때는 도전해봐야지 라고 다짐만 했었다.  




요 근래에 조금 힘든 일이 있었다. 나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밤에 침대에 누워 혼자가 되면 몇 번이고 귓가에서 나를 깎아내리는 말들이 들렸다. '너라서 그랬어', '너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너는 사랑받을 수 없어'라는 말들이 계속 내 머리를 맴돌았고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데,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계속해서 나를 갉아먹게 하고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이젠 내 모습이 나조차도 누군지 모르는 정도가 되어버린 걸 발견했을 때 내가 그동안 받았던 사랑이 떠올랐다.


주는 걸 좋아하는 성격에 항상 내가 주는 것만큼 받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더 많은 것을 항상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고 투정 부린 나 자신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사랑해준 가족들이 있었고,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게 힘이 되어준 친구들이 있었다. 힘든 시간을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를 성숙하게 해 준 예전의 사랑이 있었고 내 마음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고 계셨던 주님이 계셨다. 나는 쭉, 평생 동안을 그렇게 사랑받고 있었는데 나만 나의 시야를 어둠에 고정하고 외면했던 것이다. 


'loved'라는 단어를 고르고 오른쪽 손목에 하기로 결심을 하고 예약을 하고 나서도 마음은 갈팡질팡. 그렇지만 내가 또 힘들고 나약해질 때마다 나의 약하디 약한 멘탈은 또 무너질 것이 뻔하기에 나에게 계속해서 말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볼 때마다 '넌 사랑받고 있어', '넌 사랑받을만한 존재야', '넌 정말 사랑스럽단다'라고 내게 각인시켜줄 단어는 'loved'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그 후에 마침표도 찍어서 끝을 내고 싶었다. 내가 사랑받는다는 것에 의심하지 않도록, 의문을 품지 않도록 내게 말해주고 싶었다. 비록 I am 이 생략된 문장이지만 저 단어 하나로도 여러 가지 의미를 줄 수 있기에 드디어 나도 몸에 새길만한 큰 의미가 있는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I was loved.

I am loved.

I will be loved.

예전에도 사랑받았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받을 나 자신. 

더, 더 사랑해주자.




나는 여성스럽고 차분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곤 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타투를 했다고 하니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겁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 했어?' 라며 놀라기도 하고, '너랑은 안 어울려'라고 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했냐고 엄마는 걱정 어린 한숨도 내쉬셨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자주 볼 수 있고 보이는 곳에 해야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알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작은 벽을 깬 것 같아 무언가 홀가분하기도 하고 볼 때마다 내게 힘을 주기에 난 이 타투를 후회하지 않는다. 오늘도 난 사랑받고 있음에 감사하고 그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사랑만 하기에도 우리의 생은 모자라기에 내 손목에 쓰여진 이 단어를 오래오래 바라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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