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들어봐.
당초 20편의 글을 구상했는데 벌써 에필로그를 써야 하는 차례가 왔어. 아직 들려줄 소방관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데,, 좀 더 고민해봐야겠어.
그래서 오늘은 옛날이야기 하나 해 줄게
군대 이야기라 어떨지 모르겠네.
장교로 7년간 복무하다가 제대 후 바로 소방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번 말했었지? 그때 있었던 경험담이야.
겨울이 끝나가던 2월 어느 날이었어. 그때 난 부대의 정보장교로 근무 중이었고, 그날은 내가 당직사령을 서는 날이었지. 당직사령은 부대장이 퇴근한 뒤부터 그다음 날 아침까지 부대 내 모든 일을 책임지는 자리였어.
말은 거창한데, 사실 휴가 복귀자 체크하고, 야간 훈련 이상 유무 확인하고, 외곽 초소 근무자들이 잘하고 있는지만 보면 되는 일이었어. 그마저도 당직부관이랑 당직병들이 다 처리해서, 그냥 밤새우는 것 빼고는 힘들진 않았지.
조금 귀찮은 게 있다면, 부대장이 아침 8시에 출근할 때 중앙 현관 앞에서 도열하고 있다가, 1호차에서 내리면 막사까지 오는 10미터 동안 어젯밤 특이사항이나 아침 뉴스 중에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거였어.
이게 진짜 어려운 부분이었지.
1호차가 정차하기 3미터 전에 "충성! 근무 중 이상무!"라고 경례를 하고, 차가 서면 문을 열면서 "편히 쉬셨습니까? 어제는 불라불라..." 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거야.
그때 하는 얘기가 흥미롭거나 부대장 기분이 좋으면 "수고했네"라고 하지만, 반대로 기분이 안 좋으면 그날 하루 종일 욕을 먹는 거지. 그래서 당직 근무할 때마다 아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어.
아무튼 그날도 내일 아침에 무슨 얘기를 할지 고민하면서 근무 중이었는데, 갑자기 중앙 현관에서 비명 소리가 나고 어수선해지더라고.
급하게 나가 보니 바닥에 2미터는 돼 보이는 뱀이 꿈틀거리고 있는 거야. 초병들이랑 나까지 뱀의 이동 방향에 따라 "우와! 우와!" 하면서 달아나기만 했고, 누구도 뭔가 조치를 취하지 못했어.
그러다 누군가 "죽여!"라고 외치니까 다들 부시깽이, 마대자루 들고 와서 뱀을 두들겨 패서 죽였어. 일이 순식간에 끝났지만, 그 현장에 있던 우리 모두는 뱀을 잡고 나서 이상한 전우애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
난 아침에 부대장한테 이 뱀 잡은 얘기를 해야지 하고 설렘마저 느끼며 당직을 섰어. 아침이 돼서 경례도 아주 절도 있게 하고 "연대장님, 어제 말입니다... 그래서 부시깽이로 뱀을 때려잡았습니다!"라고 보고했어.
부대장이 걸음을 멈추더니 진지하게 듣다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워딩 그대로 말해주면 "이런 병 X 같은 장교 새끼를 봤나? 뭘 때려죽여? 부대 수호신인 구렁신을 죽여? 이 @%₩÷>₩ 새끼야!!"
부대원들 앞에서 그렇게 욕을 먹으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그날 이후로는 거의 매일같이 부대에서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대해 내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어.
부대장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병 X 장교 때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폭우가 쏟아지면 "병 X 장교가 날씨 신을 건드렸나 보다!"라고 하고, 날씨가 더우면 "병 X 장교가 더위를 불러왔다!"라고 농담을 던졌어. 심지어 밥맛이 조금만 떨어져도 "병 X 장교가 부식 창고를 잘못 관리해서 그래!"라며 나를 원인으로 몰아갔지.
처음엔 억울함과 분노로 밤마다 베개를 치며 잠을 설쳤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싶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함은 무뎌지고, 오히려 "그래, 네 말이 맞다!"며 속으로 대꾸하는 날이 많아졌어.
아무튼 부대장님께서 전출 가시기 전까지 무슨 일이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모두들 "병 X 장교 때문"이라고 외치며 분위기를 푸는 의식 같은 게 되어버렸거든.
훈련 도중 낙엽이 한 번 타들어가도, 내무반 전등이 갑자기 나가도, 이 모든 게 내가 뱀을 잡아 죽였던 그날과 연결돼 있었어. 그걸 듣는 게 처음엔 참 쓰라렸지만, 이제는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쉽게 동요하지 않게 됐어.
6개월이 지나 부대장님이 전출을 가시던 날,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어. "정대위, 병 X 장교 덕분에 우리 부대가 안전했다. 병 X 장교로 액받이 하느라 고생했다." 주위의 부대원들은 다들 크게 웃었지만, 그 말이 왠지 진심처럼 느껴지더라. 그렇게 나를 향한 욕설과 놀림이 우리 부대와 부대원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뷃!!!
그 경험 덕분에, 난 지금 어떤 직장 상사를 만나도 쫄지 않아. 그때 내가 겪었던 욕과 비난에 비하면 뭐든 다 견딜 수 있겠더라고.
회의 중에 상사가 불쾌한 말을 던져도, 업무가 꼬여도, 그저 속으로 웃으며 생각해. '그때 내가 들었던 욕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지.' 그 사건은 내 군 생활의 가장 큰 위기였지만,
동시에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독기를 만들어준 순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