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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한 삶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바깥에는 첫 눈이 내린다.

by 김멜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지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고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어릴 때 시골의 외갓집에 놀러 가면 방 문간에 걸려있던 그림에 적혀있던 시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데르 푸쉬킨의 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푸쉬킨의 시 중에 제일 많이 알고 있을 작품이다. 엄마와 이모들이 어렸을 적에 사용했다는 그 방은, 큰 방 두 개가 미닫이 문을 끼고 붙어있었다. 마루 제일 끝에 붙어있는 그 방은, 주로 나와 사촌들의 놀이 공간이었다. 조금만 시끄러워도 호통이 떨어지던 우리 할아버지의 시야에서도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이고, 미로 같은 집 구조 탓에 앞마당으로도 뒷마당으로도 바로 나갈 수 있는 방이라 다들 그 방에 모이곤 했다.


여름날이면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방 안 선풍기의 줄을 당겨 달달달 돌아가게 두고 하염없이 그 방의 대나무 자리 위에 누워있곤 했다. 문간의 벽에는 소가 밭을 가는 그림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그 액자에 푸쉬킨의 시구가 쓰여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매번 방학이 되어 외갓집에 갈 때마다 나에겐 나와의 맹세 같은 것이 있었다. 저 시구를 다 줄줄 외워야지, 그래서 다음 해 여름에 올 때까지 기억했다가 완벽히 외워 내는 거야! 하는 나만의 맹세. 절대 종이에 적지 않고, 속으로만 외는 거다. 줄줄. 일곱 살 때 시작한 나만의 외로운 사투는 아홉 살이 되던 여름에 끝났다. 외갓집에서 집으로 출발할 시간이 되면, 혼자 그 방에 쪼르르 들어가서 시구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나오곤 했다. 바로 다음 해엔 까맣게 잊었다가 액자를 보고서야 퍼뜩 생각이 났고, 그다음 해엔 일기에도 몇 번 적어댄 끝에 마침내 외울 수 있었다.


방바닥에 앉아 손으로 액자를 가리고선 세로로 한 줄, 한 줄 외워가며 시야를 가린 손을 비켜낸 기억이 난다. 그땐 그게 푸쉬킨이라는 러시아 시인이 쓴 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밭 가는 황소와 함께 그려져 있었으니, 농사일에 지친 이들에게 열심히 농사지으면 결실을 맺을거라고 말해주는 건가 싶었던 거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때도 아니라 이 시가 푸쉬킨의 시라는 사실은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뭐, 러시아에서도 농사지을 때 가축을 쓰기야 하겠지만은 러시아 사람과 누렁소와 밭고랑이라니. 좀 이상한 연결이긴 하잖아?


할 일이 좀 남아서 외장하드를 챙겨 밤길을 걷는데, 부쩍 차가워진 밤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와서 괜히 허공에 공기를 훅훅 불다가 문득 이 시구가 생각이 났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지니.' 마음은 현재를 놓고 미래를 바라기만 해도 우울할 수 있지만, 미래를 전혀 바라지 않을 때에도 우울할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가 되어버린 걸까. 어쩐지 왜 코뚜레를 뚫은 황소 옆에 이 시구를 적어 놓았는지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은 가을, 아니 겨울밤이다. 바깥에는 첫눈이 내리고, 나는 코가 꿰여 쫓아가는 황소이자 앞서가는 줄 쥔 사람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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