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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Oct 08. 2021

갑을병정

 ‘갑甲을乙병丙정’    


  우리 사회는 옛날부터 갑을이 존재했다. 그것은 연인사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혼남녀 10명 중에서 8명이 연인 사이에 갑을관계가 존재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연인사이에 갑을이 있을 게 뭐가 있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외모 차이, 성격 차이,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호감도 차이로 가장 큰 원인이 되어 갑을관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흔히 연애할 때 더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더 많이 좋아할수록 약자가 되고 을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게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또 다른 통계를 보면 남성의 경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대답이 높고, 여성의 경우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사랑을 주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고 나를 이해받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런 갑을관계는 친구 사이에서도 있다. 잘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생뚱맞게 연애니 친구니 갑을관계니 하겠지만 회사와 회사직원이 그렇듯, 방송작가들은 늘 ‘을의 입장’이다.   


  “어느 방송국 작가예요?”    

  “뭐 여기저기 다 있어요”    


  이렇게 대답하면 대부분이 이게 뭐지?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신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예요. 소속이 아니라”    


  그렇다. 방송작가는 TV 구성작가든, 라디오작가든 모두 프리랜서다. 방송국의 직원이 아니다. 비록 지역의 한 방송사에서 나를 작가로 뽑았지만, 그 방송국 소속이 아니라 그 방송국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끈이 되었을 뿐, 직원이 아니다. 비정규직 내지는 일용직. 하지만 방송국 작가실에 내 자리는 주니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20대 때는 프리랜서라는 Job이 나에게 엄청난 불안으로 다가왔다. 이 방송 끝나고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그다음엔? 또 그다음엔? 사실 미리 걱정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달고 살면서 스스로 모래성 위에 성을 지었다. 그러니 하루하루 일을 하고 있어도 불안했다. 무엇보다 PD들과의 친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친해야 또 다른 일을 주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어차피 나는 막내 작가로 들어와서 일을 배우는 중이었고, 당장 다음을 생각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그저 불안해하며 일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리고 다음 프로그램 어딘가에서 나를 찾아주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똑 부러지게 일을 잘 하면 어떤 PD가 나에게 일을 하자고 할까,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살짝 언급한 바 있지만, 방송작가는 해야 하는 일이 엄청 많다. 방송이 제작되는 전반에 걸쳐서 방송작가의 품이 안 들어가는 단계가 없다. 아이템 선정부터 섭외, 촬영 구성안 쓰기, 촬영 나가기, 편집본 프리뷰하고 나레이션 대본 쓰기, 자막 뽑기 등 작가의 할 일이 태산인데, 나랑 친한 작가와 함께할 것인가? 일을 잘하는 작가와 함께할 것인가? 이 세계는 프로다. 처음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인맥보다는 실력이다.     


  작가로서 이 정도 연륜이 되고 보니 이제 내 나이의 작가들은 대부분 결혼을 한 후, 아이를 낳고 작가 생활을 그만둔 친구들도 많다. 아니면 작가에서 한 단계 넘어간 사업을 하는 친구도 있다. 적어도 그것이 고용불안에 대해 힘듦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이 커가고 집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정시출근 정시 퇴근이 아닌 일이 버거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루틴을 만들어가는 것이니, 자기 하기 나름이다.    


  올해부터 법이 바뀌어서 작가와 같은 특수고용직도 고용보험 대상자라고 하나, 프로그램하는 동안 고용이 되었다가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시 자연인이 된다.    


  어쨌든 작가는 PD들의 선택을 받고 프로그램에 합류하거나 다큐멘터리 등에 참여하고 그에 상응하는 작가료를 받는다. 하지만 작가는 프리랜서이고, 원천징수세를 뗀다. 하지만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그 일 말고도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으며, 부가적인 수입 창출이 가능하다. 기업의 홍보영상을 제작하는데 참여한다든지, 타 방송사의 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일 슬픈 일은 ‘퇴직금’이 없다는 것이다. 제일 오래 일하고 나오던 방송국에서 짐을 들고 나오던 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방송이 싫어서도 아니고 결혼 후 임신을 하고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의 자발적인 하차였는데 끝이 너무 허무했다. 회사에 다니다가 정년이 되어 퇴직하면 적어도 꽃다발에, 퇴직금은 안고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나의 몇 년차 작가생활의 끝은 “수고했다” 한마디였다. 사실 너무 서운하고 화도 나서 방송작가의 퇴직금 정산에 대해 혹시 이의를 제기한 작가는 없었는지 찾아봤더니,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패소’, 작가의 고용 안정은 언제쯤 제대로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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