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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Sep 25. 2021

지나가는 이야기

혹은 걸어다닌 이야기



24시간 카페가 성황이던 시절이 있었다. '무인'이나 '스터디'가 앞에 붙지 않은, 그냥 카페인데 24시간 문을 열어두고 있을 뿐인. 주로 지하철역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들 중 그런 곳이 많았는데, 낮의 바쁨을 핑계로 할 일들을 미뤄 두기에 아주 적당한 기댈 구석이었다. 이따 밤에 하지 뭐, 자정부터 시작해도 6시간이나 있음, 더군다나 글은 주로 밤에 써지니까. 그러니까 새벽에 문을 여는 카페가 있던 시절엔, 고대로 들고 갔다가 고대로 들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거리를, 글감을 들고 갈 시공간이 있었다는 거다. 다시 말해 내가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건, 24시간 나를 위해 문을 열어 두는 적당한 카페가 전처럼 많지 않아서다.

오랜만에 쓰는 글엔 상관없는 서두가 참 길게도 적힌다.



*


 꾸준히 하질 못해  떨어지는 취미라곤 없던 내게 올여름 기적처럼 정착한 취미가 하나 있다.  산책. 계절을  개째 지나면서도 도무지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오피스텔 가득한 동네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처에 커다란 공원들이  있다는 것인데,   시의 기온이 35도에 달했던  계절 나는 매일  고무줄 바지를 챙겨 입고 굳이 세상 더운 취미에 몰두했다. 가장 가까운 공원  바퀴에  걸음으로 10 ,   이백 . 적당한 그루브의 노래를 귀에 꽂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 사이를 걷다 보면 두둥 두둥 3:3 농구를 하는 학생들과 차찹 차찹 줄넘기를 하는 꼬마 옆으로   커플이 배드민턴을 친다. 어제도 그제도   같은 뒤통수의 아저씨들이 환상적인 호흡으로 스치듯 뛰어가면,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걷는  같은 직장인과 0.5배속 뒷짐 걸음을 걷는 부모님 같은 분들이 곁에서 공원의 평균 속도를 맞춘다.


수많은 생각들이 몰려들었다 이내 생각 없는 내 발길에 차여 부서진다. 모기와 함께 축축하게 달라붙는 밤공기를 휘적이며 김연수와 하루키와 안철수가 왜 그렇게 달리기 예찬론을 펼쳤는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뛸 때 나는 걷고, 그들이 쓸 때 나는 느꼈다는(?) 소소한 차이들이 있지만. 여튼, 생각할 필요 없이 몸을 움직인다는 사실로 인해 오히려 생각이 정리된다는 깨달음은 과연 더위에 잔뜩 일어난 땀띠와 맞바꿀 만한 것이었다. 이 리듬감 있는 현장을 구성하는 모두가 서로를 조금은 덜 외로운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비밀은 덤이다.



*


"서울에 있을 땐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갔는데, 제주에 내려오니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더라구요."


언젠가 한 강연에서 전해 들은 얘기다. 멋지고 신박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저것은 제주에서 차박 펜션 정도는 운영하는 여유가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올해는 그래도 코로나가 안긴 '강제 여유' 덕분에 계절의 꽁무니를 배웅하는 대신 정수리를 마중하며 살았던 것 같다. 보고 싶다고 볼 수가 있나, 하고 싶다고 할 수가 있나, 가고 싶다고 갈 수가 있나. 블루를 넘어 레드, 블랙으로 이어지는 징그러운 시간 속을 하릴없이 떠내려 오며, 나는 뭘 해도 무가치할 게 뻔(하다고 생각)한 지금 대신 다음을 째려보며 버텼다. 다음 계절이면, 그다음 계절이면, 아니 대체 어느 계절에야?!

째려본 보람도 없이 여전한 봄이 왔고, 태연히 여름이 왔고, 지금은 가을이 선선히 오는 것을 적당히 지켜보는 중이다.


할 수 있는 것들과 죽어도 할 수 없는 것들
해야만 할 것 같던 일들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 일들
내 안에서 솟아난 무기력과 세상이 심은 무력감
원래 싫어했던 것들과 더 선명히 싫어진 것들

모르는 새 좋아져 버린 것들과 좋아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

자기혐오 혹은 연민

참지 못한 순간과 꾹 눌러 참은 시간들

했어야 하는 말들과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들과

차마, 미처, 채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


그 모든 것들에 발길질하며 나는 여전히 매일 밤 고무줄 바지를 챙겨 입고 뚜벅뚜벅 계절 속을 걷는다. 지나가는 만큼 다가오는 것들도 있을 거라 믿으며. 어디에든 묻고 싶어지는 계절이 오고 있다. 오겡끼 데스까! 하고.



*


한순간에 귀뚜라미가 된 여름의 개구리는 이제 귀뚤귀뚤 풀소리를 낸다. 한 계절 사이 공원의 하늘에는 셔틀콕 대신 서늘한 달이 걸렸다. 웃기지 참, 그렇게 더웠는데. 가을 개구리의 풀소리를 이렇게 번역한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결국엔 지나간다고. 기다리지 않았더라도 결국엔 더 선선한 계절이 올 거라고. 단, 또다시 더운 계절은 돌아오고, 또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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