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바이킹 Feb 06. 2022

패트로누스 마법의 잘못된 해석

어둠을 이긴 것은 과거가 아니다



아직 해리포터의 ‘다음 편’이 남아 있던 시절의 동년배라면 부엌의 튀김 젓가락 한 번쯤 그러쥐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엄마가 없는 사이 잽싸게 라면을 끓여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를 '그 능력'을 조용히 시험해 보기 위해서.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리디큘러스! 아씨오!! 세상 재미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해리포터가 수능 문제에 출제된다던 엄청난 시절을 지나, 장장 10년에 걸친 영화 시리즈도 막을 내린 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10년쯤을 더 지나는 새 이전엔 그다지 관심 두지 않았던 주문 하나가 삶에 들어와 있었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사물을 공중에 둥둥 띄우거나, 멀리 있는 무언가를 소환하거나, 괴상한 주스를 마시고 모습을 바꾸는 등의 발랄한 마법과는 거리가 먼, 생명을 죄어오는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외치는 절규에 가까운 방어 주문.


영화 속 영국 악센트 낭낭한 해리의 처절한 외침을 떠올려본다면


‘패트로누스 마법’이라 불리는 이 고대 마법의 설정은 이렇다.

‘마법계 감옥의 간수인 ‘디멘터’들은 죄수의 영혼을 빨아들여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절망과 슬픔을 무한히 되새기도록 만든다.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과거의 온갖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려 각자의 ‘패트로누스’를 불러 내야 하는데, 이것은 굉장한 고난도의 마법으로 대부분은 온전한 형태의 은빛 패트로누스를 불러 내지 못하고 지팡이 끝에서 엷은 연기를 피워내는 데 그치곤 한다.’ (주인공인 해리조차 시리즈 한 편을 다 잡아먹고 나서야 극적으로 성공해주는 정도.)


때로는 인생 전부를 잡아먹기도 하는 강력한 어둠의 감정을 행복했던 기억의 힘으로 물리친다는 마법 세계의 컨셉은, 튀김 젓가락 세계의 나에게도 천재적으로 유효했다. 슬픔은 기뻤던 기억으로, 괴로움은 즐거웠던 추억으로 덮고 가려야 다음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삶의 길목들이 내게 가르친 방어 마법이었다.




발끝까지 시린 외로움, 습관처럼 찾아드는 무력감, 뭐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열패감. 어둠이 삶의 숨을 빨아낼 때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가 가진 최고의 과거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익스펙토 패트로눔! 괜찮아, 나도 한때 미친 사랑 해봤으니까. 익스펙토 패트로눔! 괜찮아, 해내는 게 당연했던 때도 있었으니까. 익스펙토 패트로눔! 괜찮아, 누구 못지않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내게 ‘익스펙토 패트로눔’은 ‘좀 구려도 괜찮아’와 같은 말이었다. 언젠가 해리의 그것처럼 멋진 패트로누스가 나타나 이 망할 어둠의 시절을 한 방에 끝내주길 소원하면서, 나는 부들부들 삶을 그러쥐고 외쳤다. “괜찮아! 지금은 구리지만!!!”


이 주문의 이행에 뭔가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 결핍이라 느끼는 무언가를 나도 '어느 때에는 가졌던 사람’이라는 생각에 집중하는 것은, 잠시나마 구멍 난 자존감을 메워 주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가 피운 찰나의 환상처럼, 과거의 영광은 잠깐의 안도감을 주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다음번 좌절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또 다른 성냥개비가 필요했다.


더 이상 꺼내 쓸 기억도, 불러 낼 기력도 없게 될 즈음 마침내 나는 받아들였다. 패트로누스는 찬란했던 과거 회상이나 하자고 부리는 마법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는 현재의 나, 그 어떤 과거보다도 형편없고 구리다는 내가 매일 각성하는 내 안의 어둠을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설정이었다.




상당한 세월을 세상이 준 좌절과 싸우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 내가 내내 마주하고 있던 어둠의 얼굴은 과거의 나 자신이기도 했다. 좀 더 적극적이었던, 좀 더 열려 있었던, 좀 덜 생각하고 더 움직였던, 무엇보다 그런 스스로의 발걸음에 더 많은 믿음을 실었던, 그래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여유 있었던. 그렇게 '좀 더' 마음에 들었던 내 어떤 과거는 어느새 지금의 나를 '좀 덜'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되어 나의 좌절과 우울을 합리화시키곤 했다. 나를 방어한답시고 소환한 ‘좋았던 그때’는, 때로 나를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어둠의 마법이 되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언제 나타날지 모를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계단 하나를 마주칠 때마다 필연적인 부침을 겪게 되는 것 같다.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 그러니까 예전만큼 충분히 젊지 않고, 전보다 자주 거절당하고, 걱정할 것과 눈치껏 해야 할 일과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계단을 오를 때는 힘이 든다'는 사실만큼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다만 그 계단이라는 것 자체를 인생에서 처음 제대로 마주한 시기에는 '뭔가 된통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고 (계단을 하나 오른 지금은) 생각한다.




라떼는 차갑게 식었고 왕년은 지금에 없다는 것을, 솔직히 몰랐던 적은 없다. 종종 모른 체하고 싶을 만큼 오늘의 한 걸음이 힘겨웠을 뿐. 현재의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는 현재의 힘이 필요하다.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았던 과거'가 아닌, '지금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렸을 때, 마침내 우리의 해리 포터가 늠름한 패트로누스를 불러낼 수 있었던 것처럼.

과거에 옳았던 삶의 방식이 통하지 않고 어제까지 믿었던 신념이 통째로 흔들리는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를 주인공으로 한 주말의 명화를 상영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내 도가니에 힘을 넣는 일이다. 뭔가 안될 것 같고, 이젠 못할 것 같은 시간을 지나 끝내 한 걸음 오르고 보면, 어느새 그만큼의 새로운 힘과 달라진 지혜를 가진 지금의 내가 있다. 


‘구려도 괜찮아’가 아니라 ‘나는 구리지 않다’는 믿음이 어둠을 이긴다. 과거의 영광은 오늘을 버틸 땔감이 아니라 언제든 그런 힘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로 쓰기로 한다. 이 순간의 나를 믿는 힘, 그것이 패트로누스 마법의 본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