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생각 | 노트>
인지, 인식, 존재와 가치, 역사, 철학, 사상, 인간과 사회, 정치경제, 국제정치 등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은 이렇게 거창한 것인가. 아니라면 인문학은 가볍고 경쾌한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쉽고, 간편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짧게 토막난 <핵심 정보>만 입력하고 출력하며 그것을 인문학이라고 과시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본질적으로 인문학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무겁고 딱딱한, 그리고 막연한 관념을, 가볍고 부드러우며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해 준다. 무엇보다 인문학은 우리들이 이 과정들을 인식, 인지하는 주체로서 스스로 해 낼 수 있게 해준다.
뉴스가 실린 문장과 문장 사이의 맥락을 이해하게 하고, 어떤 가치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해 기술이 발전해야 하는지, 역사의 흐름을 통해 시대 정신을 어떻게 통찰해야 하는지 가치 기준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것만 알면 된다> 라는 요약된 정보를 통해 만인이 만인의 입으로 똑같은 말을 지성이랍시고 내뱉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을 매우 골치 아프게 만드는 골치거리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금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현재에도 특정 집단에는 <금서>가 당당하게 존재한다. <금서>를 지정하는 권력이나 집단은 그들이 인간의 생각 본질을 그들이 규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인지,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정의된 개념을 주입하는 객체로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역사를 통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은 지식과 정보와 그것을 생산한 인간의 사상을 독점하려는 세력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이 역시 금서를 지정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인문학이란 인간이 인지 인식의 주체가 되고, 인간존재의 고유한 가치를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이 성찰은 불편함을 넘어선 고통과 번민을 수반할 수 있다. 인문학에서 불편과 고통과 번민 등은 인간이 인지 인식의 주체가 되기 위해, 각자 자신이 그 주체가 되기 위해서 필연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간편하게 제시되고 주어지는 핵심과 해답은 인문학적 관점에서는 분명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문학은 매우 사소하다. 우리의 삶, 모든 일상이 사소한 것으로 엮여져 있듯이.
나의 삶을 내가 주체적으로 지배할 것인가 하는 고민부터 내 인간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소한 갈등들을 무엇을 기준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거창한 철학과 사상을 통해 연역되는 결론들은 거의 모든 것이 단순 명쾌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말이 있다. 이 단순 명쾌한 결론. 그러나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산은 산이었으며 물은 물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산은 산이 아니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에 이르러 드디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 대중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앵무새처럼 내뱉었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지한 채로, 혹은 맹목적인 채로 무지를 알지 못한 채, 맹목적임을 알지 못한 채 우월감에 도취되어 우리는 스스로에게, 누군가가 말했듯 가장 저급한 인간으로부터 기만당하고 지배되는 것이다.
적어도 <저급한 인간>이 어떠한가는 알 수 있을 정도 만큼은, 인문학은 사소하다. 이 사소한 것이 쌓이게 되면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통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