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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Mar 26. 2021

인문주의 그리고 보편

<작가의 생각 | 노트>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던 인문학. 그 인문학은 무엇을 위해 기여했는가 곰곰히 생각해 본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인문학 유행의 도구였을 뿐이었지만, 이 명백하고도 부끄러운 진실을 우리는 외면하거나 정당화한다. 가령, 많은 복잡한 상황, 그 상황들이 일으키는 혼란스러운 현상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럴 수 있다. 충분히 상황과 그 상황이 초래하는 현상은 복잡하며 그 본질을 통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겉멋에 빠져 인문학에 열광했으며 그 깊이에의 성찰에 게을렀다는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너무도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이다. 실제로 모든 진실 그 자체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인문학적 소양의 깊이가 얼마나 저급한가 하는 사례들은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꼽히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저급한 인식, 인지 능력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대상으로 얼마나 사람이 쉽게 오류에 빠져드는가 알 수 있지만, 늘 오류의 원인이 자신의 탓이 아닌 남의 탓이라 믿기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나의 탓이든, 남의 탓이든 우리는 이 문제를 <도덕적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 중심이라는 것은 도덕은 일탈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일 뿐 그 자체로 본질이 아니다. 인문주의는 신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옮겨오면서 도덕의 역할은 방어적, 수동적 목적으로 작용했고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인문주의는 사람의 욕망을 존중하는 곳에서부터 성장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욕망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었고, 욕망은 불순한 것이 아닌 사회 생태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결과 인류 문명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왜 사람이 인문학을 정치적, 경제적 존재로서의 사람에게 기본 덕목이며, 중요한 소양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동안 온 사회를 뒤흔들었던 인문학 열풍을 보면 다소 의아한 부분들이 있었다. 가치라는 말에 대한 오해가 그중 하나였다. 가치는 지향해야 할 목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벗어나서는 안되는 선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대중들은 그 가치를 도덕적 이상향(고대 철인들이 추구했던 일자적 이상향, 교부들이 가르치던 교리들)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이해한 듯 하다. 


가치란, 사람 중심의 가치란 그 본질을 생명으로 한다는 당연한 사실부터 짚어야 한다. 이 당연한 생명에 대한 존중은 좀더 나아가서 다른 사회적, 경제적 존재 즉,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적대성을 거부함은 물론 인류를 둘러싼 모든 생태계에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존중을 본질로 한다. 생명은 그것이 자연이든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사람이든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망, 번성하고자 하는 생태적, 사회적 욕망을 전제로 한다. 이 보편성을 부정할 수 있는 생명, 생태계는 없다.


이 욕망은, 보편성은 도덕적(일자적)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수도 있다. 이 욕망의 문제는 적어도 사회적 보편 관점에서 배타적 이기심, 적개심이 아니라면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오랫동안 인류가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을 가져온 절대 이상이 요구하는 윤리적 가치와 사람의 보편 가치는 서로 거리가 멀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보편 가치란 자연의 일부로서의 존재인 사람에게 적용되고 또 그러한 존재로서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것이다. 


보편이란 그 욕망의 존재들이 서로의 욕망을 존중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동의이다. 즉, 지극히 상식적인 의식이 사회 보편 가치를 이루게 된다. 그것이 정의라면 그것은 신적인 절대 정의가 아닌 사회 상식에 의해 용납될 수 있는 것이란 뜻이다. 따라서 그 보편 가치를 본질로 하는 모든 사회 윤리와 법은 그 상식을 벗어나는 순간 <보편 가치>에 반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위반은 그 당시 사회에 의해 추방, 배제, 제거된다. 당연한 수순이다.


많은 사람들이 <법감정>이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다. 이는 보편 가치에 반하는 법 적용에 대한 사회적 반발을 폄훼하는 말일 수 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그 적정성을 구체적 규율과 법에 적용, 해석, 판단하는 이들에 의해 <보편 가치의 훼손>이 시도되는 모습일 것이다. 법과 사회 규범, 곧 사회 정의가 그 사회 대중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당연히 반발을 사고, 그 법과 규범은 <사회의 보편 가치>에 반하지 않는지, 즉, <사회 정의>를 거스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가치가 지속되고, 또 새로운 사회 가치 체계를 형성해가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과정이다. 그가 누구든 정의를 언급하는 자의 입은 언제나 이러한 보편성을 통해 단련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의라는 말을 앞세운 패악질을 일삼는 가치와 그 가치가 작용하는 시대에 맞선 <반동>일 뿐이다. 


사람의 보편성은 다수 대중이 용인하는 곳에서 생긴다. 그것이 비록 많은 의문을 갖게 할지라도 그 시대, 그 사회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들 대중 다수가 떠안는 것이다. 보편 가치란 그 사회를 운영하는 정부, 혹은 기구의 어느 곳에 주어진 명함이나, 지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보편성>과 <가치>에 있어서 유일한 절대성은 바로 특정 계급이나 신분이 그것을 정의(define)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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