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생각 | 노트>
욕망 지향적 동물, 사람. 욕망이란 속성으로 인해 사람은 배타적 생존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괴물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욕망 지향이 다른 사람의 욕망과 충돌하고 그 충돌로 인한 배타적인 결과를 정당화하는 과정이 문명의 발전 과정이라면? 문명의 발전 과정 속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끊임없이 소모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고전적 관점은 어쩌면 일그러진 염세적 관점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때 우리가 인문학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구체적인 혹은 전문적인 통찰이 없더라도 이런 위기감을 직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사람에 대해 조금은 적극적으로 성찰해보고자 하는 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것이 대중의 유행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아닐까.
사람. 그것이 인문학의 본질이다. 앞서 언급된 사람과 노동의 관계에서 사람은 점점 약자의 지위에 놓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의 현실은 또한 단순한 자동화, 기계화를 넘어 AI(인공지능)에 의한 생산 전반에 대한 관리가 이루어짐으로써 생산성과 이윤창출은 극대화되는 반면 그로 인한 노동자 고용의 현실은 피폐해 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소한 엄청난 전환이 일어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전환의 시기 동안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될까? <사람>의 생존을 위한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 이 전환기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일자리가 없는, 고용이 불안한, 그래서 경제적으로 궁핍해 진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에 관한 고민은 사실 어떤 면에서는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라는 주장을 쉽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과학적인, 논리적인, 그래서 합리적인 주장의 핵심 근거가 얼마나 생산적인가, 얼마나 효율적인가 하는 것에 촛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생산적인가, 얼마나 효율적인가 하는 냉철한 듯한 의문은 그것이 얼마나 사람의 가치에 부합하는가 하는 기준에서 먼저 걸러져야만 한다.
생산성, 효율성 등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개념임을 쉽게 간과한다. 그리고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기계, AI(인공지능)를 발명하고 생산 현장에 투입하고 있음을 간과한 결과 이를 위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사람>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기계 등에 소모되고 이를 통해 생산의 결실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물론 그만한 이해관계가 있는 부류에 의해서 그렇게 조작, 왜곡되고 있다. 마치 생산과 효율이 지상 목표인 것처럼.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단순 명쾌한 사실은 이제 불분명한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부>를 갈망한다. 이 욕망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도태시키기 위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자신은 소수의 사람으로 계층 구조의 맨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은 사람이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었고 또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명분은 교묘하게 극소수의 사람을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궁핍하게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극소수의 사람도 결국은 사람이 필요하다. 다만, 욕망에 허덕이는 눈먼 사람들의 극단적인 이기심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시선을 놓칠 때 우리는 얼마든지 그저 욕망하는 괴물로 전락할 수 있다. 시대의 환경이 격변할 때에도 그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의 탓이 아닌, 그 시대의 환경 한 가운데에 사람을 둘 수 있는 가치는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이기 때문에 희망적이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한, 사람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가치가 현재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다면, 시대의 전환기에 사람은 당연히 무시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주객이 전도된 현상 속에서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산업혁명, 4차 산업혁명에 대한 희망에 우리는 부푼 꿈을 안고 있다. 잘 생각해보자. 산업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게 희생되었는지.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은 그저 어리석은 비극에 불과할 것이다.
인문학에 열광했던 우리는 사람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성찰하기 보다 그속에 휩쓸린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서 <유행>에 소모된 것은 아니었을까.
인문학과 사람, 그리고 현재 우리의 현실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 이 씁쓸한 의문은 단지 과장된 회의에 불과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