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와 말고기
영화 <남한산성>에는 가마니와 말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남한산성에 머무르는 동안 추위가 점점 심해지자 인조는 김상헌의 건의를 받아들여 병사들에게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가마니를 지급한다.(가마니를 바닥에 깔아 한기를 차단하고 눈이 오면 덮어 눈을 피한다) 그런데 농성이 길어짐에 따라 말을 먹일 여물이 떨어져 말들이 병들고 죽기 시작한다. 이에 인조는 병사들에게 주었던 가마니를 말의 여물로 쓰기 위해 다시 수거한다. 수거한 가마니를 풀어 말들에게 먹이지만 이미 기력이 쇠한 말들은 얼마되지 않아 모두 죽는다. 가마니를 뺏겨 관료들에게 등을 돌린 병사들은 죽은 말의 고기를 먹으며 벼슬아치들의 어리석음을 조소하고 조롱한다.
이 사건은 남한산성에서 조선이 병사들의 마음을 잃고 리더십을 상실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조선의 리더십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맥락의 흐름을 읽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가마니와 말고기 이야기에서는 사람의 마음과 맥락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 세 가지 포인트를 통해 맥락이라는 궤로 사건을 다시 짚어보고 싶다.
1. 사람의 마음은 물과 같지 않다
병사들이 지급 받은 가마니를 뺏겨 가마니가 없는 것은, 가마니의 유무를 놓고 봤을 때 처음 가마니가 없었을 때와 같다. 환경과 조건은 처음과 같아졌다. 그러나 병사들의 마음은 처음과 같지 않다. 가마니의 맥락이 변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은 온도를 영하로 낮추면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상온에 두면 흐르는 물로 돌아온다. 얼리고 난 후 해동한 물과 처음의 물은 같은 상태다. 물은 온도라는 환경과 조건에 종속적이다.
이와 같이 물(物)은 환경과 조건에 종속된다. 같은 환경과 조건이라면 같은 상태를 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물과 같지 않다. 환경과 조건보다는 맥락(context)이 사람의 마음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헌신, 사랑, 정성, 충성, 희생, 신뢰와 같은 사람의 밀도 높은 정신과 감정을 이끌어내는 힘은 환경과 조건이 아닌 맥락에서 온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리더들은 미약한 환경과 조건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맥락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훌륭한 맥락을 만드는데 탁월했다. 삼고초려의 고사가 대표적이다. 삼고초려는 우연적 사건이라기보다, 맥락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두 인물이 훌륭한 맥락을 만들기 위해 의도한 사건에 더 가깝다. 가마니 사건에서 조선은 맥락이 사람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를 간과했다.
2. '말고기'와 '죽은 말의 고기'의 차이
병사들이 오랜 굶주림 뒤에 고기를 먹고도 여전히 냉소를 품었던 것은, 그들이 경멸과 조소, 조롱의 눈으로 조선의 관리들을 바라보았던 이유는 그들이 먹은 것이 '말고기'가 아니라 '죽은 말의 고기'였기 때문이다.
'죽은 말의 고기'와 '말고기'는 형(形)은 같으나 다른 맥락을 담는다. 말이 죽게 되어 죽은 말의 고기를 내주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살아있는 말을 잡아 말고기를 베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말고기에는 진심과 마음을 전하는 맥락이 담기지만, 죽은 말의 고기에는 그러한 맥락을 담기 어렵다. 때문에 말고기를 대접받아 먹은 사람과 죽은 말의 고기를 먹은 사람의 차이는 크다. 큰 마음을 받은 사람과 마음을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조선이 병사들에게 내어줬던 것은 죽은 말의 고기이지, 말고기는 아니었다. 남한산성에서 살아있는 말이 죽어서 고기가 된 것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닿은 것은 짧은 시간으로는 절대 메울 수 없는 간극이다. 애초에 궁핍한 여건으로는 부지하기 힘들었던 말을 잡아 '말고기'를 베풀었다면 어땠을까. 이는 말(馬)로 만들 수 있는 더 좋은 맥락이었다.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리더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병사들의 가마니를 뺏어 말에게 먹이고 '죽은 말의 고기'를 어쩔 수 없이 내밀었다. 같은 말의 고기다. 그러나 고기에 담긴 맥락의 맛은 쓰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죽은 말의 고기를 내미는 사람이 아니라, 말고기를 대접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맥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맥락의 차이를 기민하게 파악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표면의 현상보다 이면의 맥락에 집중하고, 그 흐름을 읽어 좋은 맥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3. 훌륭한 맥락은 관심과 진심에서 시작된다.
가마니와 말고기 사건에서는 조선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인조까지 이 문제를 논의했다. 관여도(involvement)나 우선순위가 낮아서 실패한 경우가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의 리더십이 맥락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좋은 맥락을 만드는데 실패한 이유는 병사들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진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관심은 당신의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다. 사람은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관심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진다. 관심에 따라 주목하는 디테일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주목하는 디테일의 순서는 의사결정의 우선순위와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의 정권별 정책만 봐도 각 정권의 관심사가 정책의 우선순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원의 부족과 고갈 문제는 남한산성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컨센서스였다. 다만 디테일을 보는 차이에 있어서 조선 관료들의 눈에는 여물이 떨어져 죽어가는 말들은 잘 보였으나,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심은 거짓되지 않은 참된 마음이다. 말을 잡아 말고기를 베푸는 것은 사람에 대한 진심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니, 계산에 밝은 이는 죽은 말의 고기를 내어주기는 쉬워도 살아있는 말의 목을 치기는 힘들 것이다. 판국과 형세를 읽는데 뛰어난 이도 일의 흐름에 따라 말고기를 내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판이 반복되면 사람은 그가 판을 보고 고기를 내주는 것인지, 사람을 보고 고기를 베푸는 것인지 곧 알게 된다.
가마니를 병사들에게 내어주자 건의하고 병사들에게서 가마니를 뺏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친 이는 평소 병사들의 의견에 귀기울이고 백성을 아껴 자신의 밥을 백성과 나눴던 예조판서 김상헌이다. 반면 가마니를 거두자고 주장한 이는 공에 눈이 멀어 병사들의 등을 베며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영의정 김류였다. 다시 말해 좋은 맥락을 만들고 맥락의 중요성을 잘 읽었던 이는 병사들에게 관심과 진심을 다했던 김상헌이었고, 맥락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병사들의 마음을 가장 크게 잃고 원망을 샀던 이는 병사들에 대한 관심과 마음이 부재했던 김류였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진심의 차이가 사람을 대하는 맥락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해보인다.
무도대술(無道大術)과 대도무술(大道無術)
미디어에서 대인관계의 기술을 강조하는 인간관계론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러나 기교나 술수가 아니라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과 진심이 좋은 맥락을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왕멍의 책 <나는 학생이다> 에는 대도무술(大道無術)이란 말이 있다. 큰 도리에 이른 사람은 일부러 술수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무도대술(無道大術)은 대도무술(大道無術)을 넘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