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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May 22. 2020

나의 시놉시스가 망가졌다

이별이 준 또 다른 시각

어릴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소설만 읽었다(관련 글). 그 바람에 인격과 목적이 뚜렷한 주인공들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면서, 현실에서도 서사적 완결성을 얻기 위해 스스로와 주변인들에게 멋대로 사연을 붙여버리곤 했다. 저 아이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여동생이 갖고 싶어서일 거야. 첫 남자 친구는 고등학교 탁구부에서 생기겠지? 엄마는 나를 혼낸 후에 잠에 잘 들지 못할 거야 - 같은 종류의 천진난만한 시놉시스. 중학교 때는 친구들과 '엄마', '누나' 등의 관계적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현실에 특별한 소설적 내러티브를 부여하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연애야 말로 나의 내적 내러티브 형성을 폭발시킬 수 있는 완벽한 세팅이었다. 

사람이 가장 많은 환상을 품는 영역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내 첫 남자 친구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대학교 신입생으로서 하는 풋풋한 연애'라는 내러티브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도시락을 싸주고, 커플 운동화를 맞추고, 입도 맞췄다. 그러나 나보다 현실에 더 발을 붙이고 있던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극도로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나치게 집착하는 면모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내가 정해두었던 연애의 선로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질색팔색을 하며 헤어짐을 고했다. 돌이켜보면 몹쓸 짓을 했다. 그 당시에는 무지했으니 그런 마음이 없는 연애가 몇 번 반복되었고, 반복된 집착에 시달리던 나는 시놉시스를 조금 수정했다. '뻔한 연애는 하지 않는다. 뭔가 특별해야 시작한다.'


그 후로 오래도록 혼자였다. 차라리 짝사랑이 더 흥미로웠다. 간간히 외국인이나 매력이 아주 특이한 사람들과 짧게짧게 유사 연애를 하긴 했으나 조금이라도 뻔해질라 치면 도망을 쳤다. 그러다가 수년 전에 감성이 섬세하고 내 주변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다정한 남자를 만나 이거다 싶어 연애를 시작했다. 그 또한 소설을 많이 읽던 사람으로, 초반에는 내가 추구하는 내러티브를 아주 잘 파악하는 듯했다. 나도 그가 추천해주는 웹툰과 책을 통해 그가 기대하는 여자 친구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취향이 발달되고 다양한, 독립적인, 호불호가 분명한 여자. 아무튼 우리는 신기할 정도로 서로가 기대한 애인의 모습에 자신을 잘 맞추어 역할 수행을 했다. 실제로 잘 맞는 부분들도 많았다. 그는 '너의 부분 집합이 되고 싶어,' '네 옆에서 나는 바라던 모습으로 성장해' - 같은, 나를 큰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말들을 하며 내가 설정해둔 이상적인 연애의 시놉시스 속으로 침투했다.


an ideal


그러면서 그와 나 사이의 맥락이 형성되었다.

둘의 사이와 상황이 나빠지면서 그가 본인이 약속했던 역할들을 전혀 수행할 수 없게 되고, 나는 나대로 추구하던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을 즈음에도 - 다른 누구에게도 설명조차 할 수 없는 둘 사이의 특수한 흐름이 생겨버렸다. '신라면 블랙'이라는 단어에 자지러지고, 특정한 혐오를 공유하고, 책갈피 하나에 환장하는 그런. 그래서 그 맥락 밖에서의 그의 장점을 뭐냐는 질문에 머리를 쥐어짜내어 겨우 생각해낸 말이 고작 '귀엽다'였을 때에도, 헤어지지 못했다. 대신 계속해서 그와 나의 관계성을 어떻게든 내가 생각해둔 내러티브에 끼워 맞추려 애썼다.


너는 다정하고 생활력 강한 사람.

나는 예민해도 책임감 있는 사람.

우리는 커피를 내리고 위스키를 마시기에 최적화된 서재를 두고

시끄러운 사람들과는 거리를 둔 채 우아하고 조용하게 늙어갈 거야.


이라는 시놉시스를 써내려가는 동안 -


나는 그를 제대로 보고 있었을까.

그가 그의 역할을 수행하는지 - 즉 상황이 나의 시놉시스에 맞게 흘러가고 있는지에만 집중하여 진정한 그의 욕망이나 나의 공포 같은 것을 들여다본 일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나에게 정해둔 시놉시스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가 한 모든 약속과 그리던 지향점이 진실로 둘 다 바래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둘 사이의 균열은 잠깐의 실수이고 바로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즉 이 모든 줄거리는 나의 무의식 속에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이상과 기대가 조금 극대화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허점을 못 본 척, 나의 문제를 모른 척.


마침내 모든 것이 망가지고 상투적인 상황으로 인해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꿈꿔온 줄도 몰랐던 소중한 이야기가 산산조각 나는 꼴을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약 중독자에게서 약을 빼앗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무척 생경한 현실이었다. 모든 게 다 무섭도록 뻔해서 허망했고 흔해빠진 서사에 모멸감까지 느꼈다.


이별을 결심한 후에도 그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새로이 파악한 그는 내가 '그다움'이라고 생각했던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그는 그 순간부터 - 아니 사실은 내가 관계로 인해 무던히 울기 시작한 때부터 - 단 한 번도 내 예상대로 행동한 적이 없었고, 그것은 나를 끝없이 충격에 빠트렸다.


사실 우리는 우아하게 먼 미래나 꿈꾸기엔 어려운 두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를 추구하고 삶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좋아하는 바람 같은 사람.

나는 정착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고 좁고 깊게 창의성을 발현해야 하는 사람.

그가 간간히 귀여워하던 나의 "시무룩한" 모습은

사실은 내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던 순간들이었고,

내가 그리도 고마워하던 그의 "이해해주던" 모습은

사실은 그가 '달라지겠지'라며 참아내고 있던 것이었다.


둘 다 본인이 무엇을 바라고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시나리오대로 움직일 수밖에는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는데, 다 아는데도 - 그래도 잠깐이나마 이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고 싶어서 견뎌내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헤어진 이후에 한 대화에서, 나를 만나면서 자신의 자아가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고 했다. 시놉시스와는 별개로 끝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그의 모든 것에 공감하려 했던 나에게 그 말은 가장 큰 공격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성숙한 이별'이라는 서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반문을 씹어 삼켰다. 너를 만나면서 못나고 혼탁해진 나의 자아는?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엉켜버린 나의 내러티브는? 

실망과 분노, 그리고 여전한 애잔함이 그 후의 나를 참 아프게 했다.



이제 그 이별로부터 수개월이 지나 풍랑이 가득하던 마음이 많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나'와 '내 고통'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는 관조의 여유가 생겼다. 그때의 그와 나는 참 여유가 없었구나. 인생의 어두운 구간에서 자신이라도 제 탓을 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탓했구나. 내가 그를 모르고 그가 나를 몰랐던 만큼, 내가 나를 몰랐구나. 그래도 아마 사랑이란 것을 했으니 많이 웃고 많이 울었겠구나. 그리고 내가 어떤 내러티브를 고집했던 만큼, 그도 그만의 내러티브를 나에게 비추어보고 있었겠구나. 몽상가들이었구나.


좋은 교훈을 얻었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보아야 한다는. 상대에 대한 진정한 파악 없이 내 기대를 투영하고 이상을 관철시키려 하면 어느 순간 허상은 부서지고 만다는.


지난 수개월 동안 내가 시간을 보낸 방식 또한 이러한 깨달음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 욕망을 진득이 들여다보고 실현해나가는 시간들을 가지고, 그동안 내가 괜한 프레임을 씌우며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도 안 했던 사람들의 속내를 알아갔다. 완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나 또한 완전하지 않으며 우린 다양한 종류의 필터를 통해 삶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체화하게 되면서 - 그제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조금 더 눈을 떴다.


평생 우산을 들고 살아와서, 사실 비는 빗소리가 아니라 차가운 액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현실은 생각보다 비루하다.
그리고 걱정보다는 따뜻하다.


최근에 얻은 반지하 작업실에서 가만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또 한 번 느꼈다. 내 머릿속에서 꿈꾸던 삐까번쩍한 루프탑 작업실은 아니지만 - 이 독립된 공간에서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빗소리를 들으며 고요히 상념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네. 좋다. 이젠 비가 오면 마냥 낭만에 빠지기보다는 곰팡이 냄새 걱정을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비를 좋아하는구나.


아마도 별 거 아닐까 봐 걱정되어 나만의 시놉시스를 덧대어 견뎌내고 있던 현실은, 맨얼굴 그대로 마주 보아도 꽤나 매력적이다. 내가 부여했던 역할의 막을 걷어내고 난 후에 마주한 친구들은 뚜렷한 자기만의 색으로 빛이 나고 있었고, 어두운 서사로 점칠해 놓았던 가족 관계도 우려보다 훨씬 단단하다. 내 음악은 조촐하게 시작하였으나 분명히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고, 내게 애정을 주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내 내러티브에 들어맞진 않지만 각자 제 인생분의 이야기와 장단점을 한 아름 들고 와서 나를 즐겁게 한다.


나의 시놉시스가 망가졌을 때,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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