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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Jan 31. 2022

책을 동시에 여섯 권씩 읽는다

연휴 아침, 겨우 10시쯤 일어난다. 따뜻한 차를 내려 방구석의 작은 소파에 앉는다.

자 책이나 읽어볼까 하는데, 책갈피가 꽂힌 채 이래저래 흩뿌려져 있는 책들이 딱 봐도 대여섯 권은 된다. 이건 비교적 최근에 생긴 나의 나쁜 버릇이다. 한 책에 진득이 집중하지를 못하고 자꾸만 다른 책들에 기웃거리는 것. 그때그때의 기분, 읽고 싶은 문체, 끌리는 표지가 달라서 그런 것이라 변명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냥 집중력 부족이다. 뭘 이렇게 정신 사납게 읽는지 헤아려나 보자 해서 한 데 모아 본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다루는 유쾌한 여행기

� 읽는 이유: 참여하고 있는 독서 클럽에서 다루는 책이고 쉽게 술술 잘 읽힌다

� 놓는 이유: 하루에 한 명 이상의 철학자를 필요로 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다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Adventures Vol.2)

코난 도일

� 읽는 이유: 어릴 때부터 심심할 때면 한 챕터씩 꺼내보던 추리계의 클래식은 언제 읽어도 재밌다

� 놓는 이유: 은근히 머리를 쓰면서 읽는 지라 에피소드 하나만 읽어도 벅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Wonderland)

루이스 캐럴

� 읽는 이유: 표지가 예쁘다

� 놓는 이유: 내용을 다 알아서인가... 일어나는 일은 많은데 읽고 있으면 묘하게 졸리다


이토록 황홀한 블랙

존 하비 / 패션, 종교, 예술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변주되는 '검은색'의 모습을 추적한 인문서

� 읽는 이유: 가장 좋아하는 색이 검은색이 사람으로서 블랙의 역사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 놓는 이유: 인문학적 소양을 고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금세 꺾어버리는 지루한 역사적 디테일


일상적인 삶

장 그로니에 / 독서, 담배, 향수 등 사물 혹은 행위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차근차근 치밀하게 분석하는 그로니에 산문집

� 읽는 이유: 장 그로니에의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담담한 문체에 마음이 편해지다가도 일상을 접근하는 그만의 시각을 목도하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 놓는 이유: 글을 쉽게 쓰는 작가는 아니라 쭉쭉 읽어나가기엔 무리가 있다


가벼운 나날 (Light Years)

제임스 설터 / 미국 최고의 문장가 제임스 설터가 결혼과 욕망의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 읽는 이유: 특유의 몽환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와 수려한 문장에 끌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읽게 된다

� 놓는 이유: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져 읽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있다(?)




어떤 날은 두 책을, 심한 날은 세 책을 왔다 갔다 하며 읽는다. 나는 잔디밭에 엎드려 맨다리로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는 우아한 서른 중반의 여자가 됐다가(가벼운 나날), 기차 여행을 하며 소크라테스의 괴벽을 곱씹어보는 우울하지만 유쾌한 백인 남자가 됐다가(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환각제 먹인 괴상한 세계를 담담히 헤매는 어린 여자아이가 된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때때로 자아가 흐려질 정도이다.



현재 시제로 현실을 살겠다고 결심해놓고서
자꾸만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세계를 옮겨 다니며
도망치는 스스로가 한심해지기도 한다


pinterest


정오가 되도록 커튼을 열지 않은 방에는 위염이여도 커피 없이는  산다며 꾸역꾸역 내려마신 디카페인 드립 커피의 향이 가득하다. 창가 양쪽으로 솟은 책장, 소파, 책상, 침대  테이블 - 어디고 책이 가득하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이곳 또한 나의 현실이다. 어디 먼 곳으로 떠나는 내 의식이 편안히 길을 잃고 멋진 방황을 할 수 있도록 아늑히 제 역할을 다하는 나의 방.


 안에서 소파에 파묻혀 책을 읽는 . 가끔 책을 내려놓고 멍하니 향초 불빛을 바라보는 . 무작위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두고 독서를 하다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면 후다닥 제목을 확인하고 저장해두는 . 소설 아닌 장르의 책을  읽기 위해 의도적으로 에세이집과 인문학 서적들을 눈에 띄게 배치한 .  번째 책으로 넘어가기  스쿼트를 하며 세계 이동을 준비하는 .  모든 것을 - 현실으로부터의 도망이라는 갈급함 없이 그저, 어린 시절 이후 되찾은 책에의 무한한 애정으로 가득  뿌듯한 마음으로 대하는 .


내 방은 여러 세계로 이동하는 훌륭한 포탈이다.

베이스캠프가 이토록 내 취향대로 꾸며져 안정감이 있으니 겁도 없이 답싹답싹 끌리는 이야기 속으로 출발하는 것이겠지. 조금 혼란할 지라도 이 괴상한 책 읽기 방식에 나는 만족한다. 평생을 이렇게 책으로 떠나고 싶다. 책으로 떠나는 내가 사는 현실을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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