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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견과상념 Mar 21. 2024

뉴욕에서 하프 마라톤을 뛰어보았습니다

뉴욕조각보_러닝 5년차의 두 번째 하프 마라톤 도전기

 3월 17일 일요일 오전 8시 32분.

 아침 6시에 일어나 꾸역꾸역 아침을 먹고,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한 시간 정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 브루클린에 내려 기나긴 시큐리티 라인을 통과하니 마침내 하프 마라톤의 출발선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 아침 팔자에도 없는 이른 기상 때문에 살짝 몽롱하던 느낌이 일순간에 가시며 약간의 긴장감이 부드럽게 올라왔다. 출발선을 향해 서서히 걷다가 점점 속도를 올렸고 출발선을 통과하기 3초 전, 애플워치 러닝앱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3, 2, 1, Go! 

 러닝앱의 카운트다운에 맞춰 출발선을 넘어 레이스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작년 브루클린 하프 마라톤을 뛰고 근 1년 만의 레이스인지라 금방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함께 저마다의 레이스를 펼치는 수많은 주자들, 주자들만을 위해 통제된 주로, 곳곳에 포진해 있는 응원단들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햇볕이 강하지 않은 10도 안팎의 날씨는 긴팔에 반바지를 입고 뛰기에 최적의 날씨였고 새로 산 애플워치의 화면에서는 평소보다 빠른 5분 30초 전후의 페이스가 깜박였다. 느낌이 좋았다.


 브루클린에서 시작해 이스트 리버를 가로지르는 맨해튼 브릿지를 건너고, 차이나 타운을 거쳐 타임스퀘어를 통과하고 마침내 피니쉬 지점인 센트럴 파크에 도착했다. 준비기간 내내 달려온 익숙한 센트럴파크의 주로를 마지막 힘을 짜내어 통과했다. 막판에 다리가 쇳덩이를 단 듯 무거워지는 바람에 육성으로 욕을 뱉으며 우거지상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던 작년과 달리, 이번에는 결승선의 카메라도 의식하며 양팔을 활짝 벌리고 웃으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달리는 도중에는 왠만하면 핸드폰을 꺼내지 않는데 맨하탄 브릿지와 타임스퀘어에서는 꺼낼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끝났다!’라는 해방감과 기록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앱으로 내 기록을 트래킹 하고 있던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1:59:40! Sub 2! Congrats!”

 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며 나도 급히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나의 이름을 입력했고, 기록은 틀림없이 1시간 59분 40초였다. 핸드폰 화면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두 팔이 툭 떨어지며 힘이 쭉 빠졌다. 작년엔 비까지 오는 악조건에서 죽을 둥 살 둥 달려서 겨우겨우 1시간 58분 58초의 기록을 냈는데 좋은 컨디션, 좋은 날씨 속에서도 작년에 비해 오히려 1분가량 기록이 늦었다. 


 1분이 뭐 대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풀 마라톤의 세계 기록은 2000년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작 5분이 단축되었을 정도로 장거리 러닝에서 또한 매 분 매 초가 새로운 역사이다. 나 같은 아마추어 러너에게는 1분이면 200m를 더 갈 수 있는 시간이었고, 더욱이 하프마라톤 같은 장거리는 자주 참여가 어려워서 되도록이면 참여할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기록을 당기는 것이 유리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자면 마라톤을 뛸 때 정확히 직선으로 21km를 달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헤치며 지그재그로 21km를 나아가야 해서 실제로 내가 달리는 거리는 21km보다 조금 더 긴데, 그 거리를 얕봤다. 실제 내 러닝앱에 찍힌 거리는 21.5km 었고 하프 마라톤의 공식 거리 대비 400m 이상 더 뛴 셈이었다. 훈련할 때는 거리 위주로 측정을 했던 터라 총 시간이 아닌 총 거리가 보이게끔 러닝 앱을 설정해 두었는데 어차피 거리가 정해져 있는 마라톤을 뛸 때는 거리가 아닌 시간을 중심으로 페이스 조절을 했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지라 지난 글에서도, 또 사람들에게도 공공연히 이번 하프 마라톤에서는 기록 욕심 없고 부상 없이 완주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막상 훈련을 해오면서 스스로에 대해 소복이 쌓여오던 기대감과 당일에 받았던 좋은 느낌이 더해져 슬그머니 생긴 기록 욕심이 무너지자 여간 속이 쓰린 게 아니었다. 한 문제 차이로 시험에 떨어진 사람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이 구간에서 왜 이렇게 느려졌을까, 내리막길에서 조금 더 기록을 당겨둘 걸, 등의 생각으로 기록을 복기하며 이미 지나와버린 주로에서의 시간을 톺아보았다. 


 내가 나의 두 다리로 온전히 얻어낸 결과물이라 하소연도, 원망도 할 수 없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기록은 앞서 말한 여러 요소들을 간과한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mind-body connection의 부재였다. 막상 당일이 되면 은근한 기록 욕심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손사래를 치며 욕심 따위 없다며 스스로의 의지를 떨어뜨렸고 실제로는 작년과 거의 비슷한 연습량을 달성했음에도 혹시 모를 실망감이 두려워 나에 대한 기대치를 낮췄다. 낮은 의지와 기대는 자연스레 집중력의 부재로 이어졌고, 두 시간 동안 호흡, 케이던스, 주법 등 달리는 행위에 온전히 집중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의 몸은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잡히지 않은 산란한 마음은 결국 42초만큼 나를 느리게 만들었다. 


이번 하프 마라톤의 주로. 워낙 뉴욕의 대표적인 곳들을 많이 지나가서 그 어떤 마라톤보다 달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그나마의 기록이라도 낼 수 있었던 건 달리면서 맞잡은 친구들의 손과 그들의 함성소리 덕분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 무리에서 나 포함 두 명이 이번 하프 마라톤에 참가한 덕에 무려 열명 이상의 친구들이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대문짝만 하게 프린트한 친구와 나의 얼굴을 들고 센트럴파크로 응원을 와주었다. 브루클린부터 시작해 곳곳에 숨어있던 러닝 크루 사람들과 “Tap it to power up!” 등의 귀여운 포스터를 들고 있던 아이들까지 눈을 마주친 모든 사람들의 응원이 담긴 눈빛이 내 다리를 움직였다. 


 특히 연주나 노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춤 공연을 하는 것도 아니요, 보는 재미가 있는 스포츠 경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러닝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친구들이 2만 7천여 명의 러너 중 한 명인 나에게 주로를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응원을 건네기 위해 나와주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영감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계산적이다. 무언가를 웃으며 주고받을 때도 머릿속엔 자꾸 방정식이 떠다닌다. 방정식의 변수가 달라지면 해가 달라지고, 내게 주어진 몫이 내 기댓값에 미치지 못하면 혼자 억울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주는 기쁨 또한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지만 성정이라는 것이 대번에 바뀌지는 않았다. 그런 내게 보는 즐거움도 딱히 없고 기다림 대비 응원의 시간도 찰나에 지나지 않는 누군가의 마라톤을 응원하러 주말 아침 일찍 나선다는 것은 애초에 선택지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지극히 개인적인 도전을 하는 누군가를 응원하기 위해 바라는 것 없이 시간과 애정을 할애한 여러 명의 친구들은 바쁘게 방정식을 풀어나가는 사이 내 안에서 빛이 바랜 우정, 공동체, 인류애 따위의 납작한 관념들을 구체화시켰다. 계산 없이 타인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지지하는 마음이 대상을 향한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그 대상에게 얼마큼의 크고 유의미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몸소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힘과 애정을 보태준다고 내 몫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박하게 굴었을까에 대한 후회도 함께 밀려왔다. 굳이 따지자면 ‘하프마라톤 완주’라는 가시적인 성취를 이뤄낸 것은 나였지만, 그 성취를 함께 축하하는 친구들에게서 되려 나도 누군가의 이름을 힘껏 부르고 달려오는 그와 손을 마주치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얻었다. 


 마라톤이 끝나고 맨해튼에서 지하철을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가고, 디저트를 먹고, 친구네 집에 뒤풀이를 하러 가는 내내 친구들은 내 얼굴이 크게 인쇄된 포스터를 들고 다녔다. 왠지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응원을 받았다는 표식 같아 슬쩍 기분이 좋기도 했다. 뒤풀이를 마친 후에 포스터를 따로 처리할 방법도 없어 우선 집에까지 들고 오긴 했는데 벽에 기대어져 있는 활짝 웃는 (포토샵 된) 나의 얼굴에 역시 잘 적응이 되진 않는다 그래도 포스터가 내 눈에 걸릴 때마다 나는 지금까지 드물었고 앞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줄 알았던 누군가를 향한 계산적이지 않은 응원이 좀 더 내 안에서 단단히 뿌리내렸음을 느낀다. 


마라톤이 끝나자마자 들이키러간 기네스 생맥주 - 최고의 흑맥주였다


 결승선을 통과해 기록을 확인하자마자 느꼈던 허무함과 아쉬움은 여전히 혀끝에 씁쓸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번 마라톤을 통해 내겐 스스로의 기록과 개인적인 발전에 대한 동기 이외에도 감히 더 고차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동기가 생겼다. 


빨리 뛰진 못했지만, 함께 뛰었던 뉴욕 시티 하프 마라톤이었다. 


센트럴파크의 피니시 라인에서 마지막 스퍼트


 P.S. 작년에 하프 마라톤을 처음으로 완주하고 원하는 기록을 얻고 난 후 당분간 내 인생에 하프 마라톤은 없다는 굳은(?) 다짐이 있었는데, 얼떨결에 참가가 당첨되어 뛰게 된 이번 하프 마라톤에서 아쉽게 기록 경신에 실패하니 오히려 당장이라도 빨리 하프를 뛰어 기록을 당기고 싶다. 인간이란 뭘까… 이러다가 풀도 뛰는 거 아냐?


P.S.2 뉴욕에서 지난 2년간 꽤 많은 레이스에 참가했는데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 정보성 위주의 글도 써볼까 싶다. 궁금해하는 사람이 좀 있으려나?

이번 마라톤 기록증으로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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