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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금 Nov 01. 2024

너 영어유치원 보낸다.

엄마의 장래희망은 모성애에서 시작되었다.

"엄~마~" 

바닥에 배를 찰싹 붙이고 팔다리만 파닥파닥 움직이며 배밀이를 했던 게 엊그제 아니었던가. 어느새 자라서 애교 있게 배시시 웃으며 엄마를 부른다. 그리고 새우깡 같은 손가락을 쫙 펼치고 손뼉 치며 아장아장 걸어오는데 천사가 따로 없다. 여자 아이라 그런지 돌 즈음부터 엄마, 아빠, 맘마, 주세요 같은 간단한 말들도 제법 잘했다. 우리 아기 정말 폭풍성장했구나. 나도 그동안 폭풍같이 여자 사람에서 아기 엄마로 변했다. 아니 성장했다고 하자. 



출산 이후의 1년은 어쩌면 아이뿐만 아니라 나도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 인생에 다시없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깊게 사랑해 본 것도 처음이고(남편에게는 비밀로 하자. 아니, 아마 나랑 같을 수도 있겠다. 샘샘으로 하자.), 이렇게 맑고 순수한 사랑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대화(거의 일방적이었다.)도 나누고, 노래도 불러주고, 문화센터에 가서 베이비마사지라는 것도 배웠다. 모든 게 어설픈 곰손 엄마지만 내 나름 진심으로 용을 썼다. 하루종일 용쓴다고 지친 나에게 아이가 한번 웃어주면 그걸로 족했다. 충분했다.  





그렇게 엄마로 자아정체성이 바뀌는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돌이 되었다. '이대로 살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훅 들어왔다. 물론 내 모습을 찾길 원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당시엔 아이가 격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러니까 모성애가 극에 달했단 말이다. 인생을 여유 있게 즐기며 세련되게 살아가는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금 보니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여놨다. 내 아이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면서.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럼 난 이제 뭘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취미도 하나 없이 집, 학교, 회사만 평생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 하다 못해 요즘 친구들이 많이 한다는 인스타그램도, 블로그 계정도 하나 없었다. 남한테 내 사생활 왜 보여주는데 시간낭비 하냐고 비난했었지. 아. 나 정말 재미없게 살았구나. 생각이란 걸 안 하고 살았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도 정신줄 놓지 말고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집어든 게 자기계발서였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뭐든 시작할 수 있는 의욕과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다. 책을 읽고 의욕은 충만해졌는데 정작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워낙 색깔도, 재미도 없이 살아왔는데 책 몇 권 읽었다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게 이상하지. 자기계발서들을 보니 목표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수치로, 이를테면 '나는 2025년까지 100억 자산가가 되었다.'처럼 명확하게 정하는 게 좋단다. 흠 어쩐다. 나란 사람 어떤 목표를 잡고 가야 할까. 설거지를 하면서, 아이를 재우면서, 빨래를 개면서 틈틈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괜찮은 연봉을 받고 있다가 휴직 중이었던 나. 돈이 가장  궁했다. 좋아하는 일은 도무지 모르겠고, 잘하는 일은 눈곱만 한 것도 찾기 어려웠다. 아이는 이제 말도 하고 걸어 다닌다. 마음이 조급했다. 


빨리 뭔가 해야 하는데.


 




칸칸이 다 열어서 탈탈 털어봐도 다 구겨진 종이 조각만 날리던 내 머릿속 서랍장. 제일 안쪽에서 '돈'이라는 빳빳하고 반짝이는 카드가 나왔다. 카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사랑하는 내 아이가 5살이 될 즈음엔 여유 있게 영어유치원을 보낼 능력이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래. 돈 잘 버는 엄마가 되는 거야. 오케이 좋았어. 그럼 월 천만 원을 목표로 해보자. 그 정도 벌면 우리 집 가계에도 도움 되고, 은행에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며 아이 교육에도 부담 없이 투자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그렇게 모성애를 자극하면서도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구체적이고 수치화된 나의 첫 번째 장래희망을 정했다. 우리 아기의 영어유치원을 위해 내 열정을 활활 태우리라. '나는 2023년 월 천만 원 버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다이어리 한편에 써넣었다. 혼자 흐뭇하게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뭘 해서 월 천만 원을 벌지? 





아이와 남편을 재워놓고 식탁 위에 노트북을 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자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 만큼 고요한 밤, 나만의 비밀 전략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노트북, 은행에서 받은 것이다. 날 힘들게도 했지만 나에게 많은 걸 주기도 했구나. 피식 웃으며 짧은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초록 검색창에 수줍게, 그렇지만 천만 원의 욕망을 담아 검색어를 입력했다. '집에서 돈 버는 법'. 뭐 할만한 게 있으려나 하고 죽 내려보다가 눈에 띄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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