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소품집
He enjoys "himself" at Paris.
직역하면
그는 파리에서 "그 자신으로" 즐거웠다.
파리가 즐거웠다가 아니고 파리에 있는 '자신'으로 즐거워했다 라는 이 짧은 영어 문장이 머리를 탁 친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지 않다라는 말도 이 문장 하나로 설명이 된다. 물론 파리까지 날아갈 여행비가 있어야 파리에서 즐기는 '자신'이 있을 수 있지 않나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굳이 그렇다면 이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He enjoys Paris.
그러나 이 문장은 어딘가 어색하다.
'himself' '자신'으로 온전히 어디에서나 어느때나 즐거울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건강, 능력, 수입, 친구, 거주지 등과 같은 외적인 조건이 아닌, 내가 처한 현실 안에서 나의 상태를 직시할 수 있다면 행복에 근접해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자극적인 모바일 영상과 쇼츠 이미지들 사이에서 "나 자신"(myself)으로 존재하는 온전한 행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때쯤.. 나에게 찾아와준 쇼펜하우어 소품집.
현재로 충만한 현실에서
주관과 객관이 존재하는 일은
마치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을 만드는 이치와 같다.
즉, 아무리 필수적이고 확실한 연관성이 있어도 주관과 객관을 결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속물(!)의 가장 큰 고통은 이상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현실만 맴돌며 지루함을 벗어나고자 애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현실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는 면이 있으므로 즐기기는 커녕 지쳐버리고 온갖 수고와 괴로움 고통을 떠 안게 된다.
쇼펜하우어 소품집에서의 이 문장은
현실을 떠 안 되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준다.
현실을 현실로 살면 현실의 속성인 고통과 괴로움, 지루함 밖에 남지 않는 것.
어떤 모양이든 객관적인 현실을 떠안고,
주관적인 현실을 결합할 줄 안다면
결국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신비한 '물'을 만들어내듯이 객관과 주관을 결합하여 행복이라는 '물'을 만들어내는 인생을 살아가길 나 자신에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