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 지난 관계는 폐기하세요


최근에 알게 된 '밀라논나'라는 멋쟁이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인기 유튜버이자 한 때 패션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커리어우먼이기도 하고, 내면의 깊이로 따지자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진짜 '어른'이다. 어떤 알고리즘으로 그녀의 유튜브 채널이 내 피드에 떴는지는 모를 일이나, 나는 그녀가 전해주는 따스하고도 현실적인 조언들에 매료되어 최근에 하루에 하나씩은 그녀의 영상을 보고 섬기고 있다.


세상 풍파를 겪고 몸소 깨달음을 얻은 현실 어른의 조언이 얼마나 알찬 지를 느끼던 찰나, 그녀의 숱한 조언들 속에서도 유난히 나를 번쩍 뜨이게 했던 말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닌 친구관계에 대한 조언이었다.


구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짜여진 영상이었는데, 그중 질문 하나가 '친구관계가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해야 되냐'는 것이었다. 내가 최근에 가장 고민하던 부분이 친구관계라서 그랬을까. 그 질문에 이어진 밀라논나의 대답은 쏟아지는 족족 내 뼈를 때렸다. 그녀의 말을 옮겨본다.


제가 세월이 지나면서 깨달은 게 뭐냐면 아, 인간관계도 유효기간이 있구나. 친구가 여러분들을 배신했을 때, 여러분들을 괴롭히지 마세요. 그리고 미울 때는 미워하세요. 욕 하세요.

<중략> 어느 순간 근데 내가 왜 얘를 욕하면서 왜 내 에너지를 쓰고 있지? 왜 내가 내 마음을 지옥을 만들지?(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여러분들이 제일 중요한 건 여러분들 마음이잖아요. <중략> 그러니까 인간관계를 맺을 때에 항상 나를 중심에 두고, 진짜로 정의로운지, 신의를 지키는지, 정직한지, 그리고 측은지심이 있는지 그런 거를 보고 친구를 사귀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런 친구들이 여러분들을 떠나가도 배신해도 아까워하지 마세요. 그런 친구들은 도움이 안 돼요. 아, 인간관계 유효기간이 끝났구나(하고 생각하세요). 여러분들 유효기간 끝난 음식이나 약은 버리시잖아요. 그냥 폐기하세요. 여러분들의 인생의 주인공은 여러분이에요.



늘 연인관계가 내 인생의 골칫거리였기에 20대 때의 나는 친구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안정적인 관계의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나자, 그제야 뒤늦게 내 인생에 친구관계에 대한 고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친구란 늘 영원하고 진실되며, 연인처럼 점 하나 찍는다고 남이 되지 않는 부류의 인간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견고한 줄만 알았던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가 사실은 내 착각이었음을 알리는 사건들이 작년부터 계속해서 일어났다. 6-7년을 격의 없이 알고 지낸 친한 사이었는데, 일이 있다며 내 결혼식에 나타나지도 않고 카카오페이로 축의금만 (그것도 5만 원만) 떨렁 보냈던 어떤 친구 A. 서로 다른 지역에 있어도 내가 기꺼이 먼 거리를 차비를 내고 발품을 팔아 만나러 갈 만큼 아끼는 친구였지만, 그때마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핑계를 대며 약속을 파투 내던 친구 B.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며 힘들어 죽겠으니 지금 당장 만나줄 수 있냐고 물어 달려갔더니, 심지어 내게 밥값을 계산하게 하고는 남자 친구와 재회하자마자 다시는 연락이 없던 친구 C까지. (그녀는 남자 친구와 잘될 땐 연락을 꺼리고, 헤어지거나 싸우면 내게 연락하는 게 패턴이더라) 나는 그 황망한 관계 속에서 나만 맘 졸이고 애정을 쏟았다는 생각에 서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두 최소 5년씩은 알고 지낸 친구들이었다. 견고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금이 가서 여기저기 빗물이 새고 있는 줄 미처 몰랐다. 그러다 그 빛바랜 관계의 실체를 나는 어느 순간 갑작스레 직면하게 됐고, 그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이룬 관계들을 통째로 잃는 것만 같아 인정하기 힘들고 두려웠다. 모두 한 때는 찬란하고 빛났던 관계들, 서로를 향한 따뜻한 애정에 기꺼이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관계들이었는데.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끈 떨어진 관계가 아니라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나였다. 막상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들에게서 멀어진 내 마음을 두고 ‘내 마음이 식어서‘라며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내가 속물이라서, 내가 더 따뜻한 인간이 못돼서, 그들이 내게 저지른 실수와 이기심들을 품지 못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곤 했다. 견고했던 관계를 내가 지키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었었다.


한 때는 빛이났던 관계도 언제든 소멸할 수 있다.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때로는 겪고 있는 상황을 스스로 정리할 방법을 도통 모르겠더라. 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니. 갑자기 1,2년 사이에 벌어진 친구관계의 문제를 끌어안고, 나는 원인도 해결점도 모른 채 답답하게 지내던 상태였다.


그러던 찰나에 내 고민의 지점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밀라논나의 차분하게 정리된 격언을 듣게 된 것이다. 이 어찌 유레카가 아닐 수가.



그녀의 말처럼 관계에도 정말로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왜 친구는 천년만년 썩지 않는 관계라고 철석같이 믿었을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쉬어버린 관계를 두고 왜 부지런히 내 탓만 하고 있었을까. 유통기한이 지났으니 그 관계는 이제 폐기할 때라는 걸 왜 왜 나는 몰랐을까.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덜 상처 받았을 텐데. 조금 더 일찍 다른 좋은 사람들을 위해 맘을 열었을 텐데.


하지만 한편으론 지금에라도 알게 된 게 어딘가 싶다. '내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볼 게 아니라 '이 관계의 무엇'이 문제인지를 고민하고, 관계의 소멸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누가 됐든, 관계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면 나 혼자 불필요하게 애쓰지는 않게 됐으니까. 내가 애써야지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이미 그 관계는 서서히 쉬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니 제법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그래야만 더 좋은 관계의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온다는 걸 이제는 깨닫는다.


최근 나는 20대 때 알게 된 오래된 친구들 중 제법 여럿을 폐기했다. 사실 관계는 오래전에 소멸했건만 내가 억지로 냉장고에 붙들고 있던 쉰 요구르트 같은 관계들이었다.


관계가 소멸했어도 인정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 내 지난날의 과오들이라면, 이제는 그들을 냉장고 깊숙이에서 솎아내 제 때 폐기할 줄 알게 되었다. 마음은 아프지만 유통기한이 지나다 못해 푸르스름한 곰팡이까지 피어 도저히 회복이 불가한 관계들이니, 미련은 NO NO 절대 금지다. 그런데 놀랍게도(혹은 당연하게도), 폐기당했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친구는 단 하나도 없더라. 왜냐면 그 친구들은 자신의 냉장고에서 나를 꺼내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관계가 이미 끝나 있었다는 것이 이로써 증명된 셈이려나.



덕분에 요즘의 나는, 오래된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내 정서와 가치관에 맞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모름지기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아야 관계도 고이지 않고 순환이 되는 법일 지니. 물론 이 새로운 관계들에도 예상치 못한 유통기한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관계들이니까, 빛을 발하는 이 관계의 순간을 제대로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나중에 그 관계가 소멸했을 때, 그때는 미련 갖지 않고 상처 받지 않고 그들을 놓아주어야지.


관계의 중심에서 나를 고립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30대가 되어서야, 나는 배워가는 중이다.






해당 글은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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