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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공간과 사람에 대하여

by 안노 Mar 17. 2025

   새벽 경매 시장은 치열한 전투다. 생존의 전쟁.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솔하고 뜨거운 생존의 현장, 그 곳을 오래도록 사랑했다. 


  여덟 살 무렵, 진녹색 두줄 운동복 차림으로 중년의 아버지 손을 잡고 새벽 외출을 하던 곳이었다. 아버지는 주로 어시장 새벽 경매를 좋아했다. 우리는 항구 도시에 살았다. 해 뜰 무렵, 거인처럼 커다란 배가 부웅- 하며 항구로 들어오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아버지와 나는 이방인처럼 그들 사이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마치 전쟁터에 시찰 나온 사람들처럼. 


  아버지 인생은 딱 그 때처럼이었다. 진흙탕에 날생선들이 펄떡이고 경매 본 생선 상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한 긴장감마저 감도는 어시장 한가운데서, 새하얀 체육복을 입은 아버지는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런 아버지 손을 꼭 잡은 어린 나도 그렇게 작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우리는 잠시 방향을 잃었다. 


  "좀 비키소!"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안으며 커다란 짐수레를 피하다 웅덩이에 발을 헛디뎌 바짓가랭이가 온통 구정물 투성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 표정은 아주 평화로웠다. 정말 그 순간처럼 아버지는 살았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의무를 다하는 삶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아버지는 삶을 관망하는 자세였다. 마치 잠시 이 지구별에 놀러 온 사람처럼. 그리고 아주 가끔 방향을 잃곤 했다. 지금의 나처럼.


  "행님!"


  큰 삼촌이었다. 아버지는 동생들이 많다. 그 중 가장 첫째 동생이었다. 삼촌은 어시장 짐꾼이었다. 아버지는 삼촌을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새벽부터 어쩐 일입니꺼! 제삿고기 사러 오셨어예?"


  아버지는 이럴 때마다 말없이 미소만 짓는다. 사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를 간 곳들이 무슨 특별한 용무가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목적 없는 외출. 그러니 대답이 궁색할 밖에. 지금의 나 역시 누군가 내 외출에 이런 질문을 던져오면, 그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 나도, 치열하게 열심히 극성맞게 살아낸 삶인 줄 알았는데, 결국 한 발 물러선 이방인은 아니었을까!


  "해장국이나 한 그릇 하입시더!"


  삼촌은 아버지와 어린 나를 어시장 귀퉁이 작은 국밥집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모처럼 방향을 잡았다. 그 새벽 공기 속에서 언 몸을 녹이며 먹던 국밥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힘들제?"

  "아입니더! 어무이는 시골 내리 가싰지예?"

  "어제 가싰다. 아버지 제사 때나 오실 기다!"


  어른들의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 후루룩 후루룩 호호 불어가며 먹는 사람들의 숨소리, 코에 진동하는 고깃국 냄새, 푸른 새벽 국밥집 문 밖으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우리는 잠시 전장의 반공호에서 그렇게 쉬고 있었다.




  다방은 내게 일요일 오후 아이스크림 먹는 가게였다. 내게는 삼촌이 다섯이나 있었다. 그 중 막내 삼촌은 일요일 오후가 되면 어린 나를 데리고 시내 다방에 갔다. 삼촌은 끼가 많았고 배우가 되려고 몇 번을 상경했다가 형님들에게 끌려 내려왔다. 끼만 많은 게 아니라 프랑스 배우처럼 정말 잘 생겼다. 삼촌은 내 손을 잡고 좋은 음악과 좋은 냄새가 가득한 다방에 들어가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았다. 삼촌 주변으로 화장을 진하게 한 예쁜 여자들이 몰려와 둘러쌌다. 어린 나는,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삼촌 옆에 딱 붙어 앉아있었다. 그러면 더 귀엽다고 까르르 까르르 웃고 떠들고 난리였다. 어린 내게 그 곳은 재미있고 달콤한 장소였다. 삼촌은 항상 내게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주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던 그 행복한 기분은,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서 밤새 떠먹어도 지금은 느낄 수가 없다.


  막내 삼촌은 나를 데리고 시내 여기저기를 잘 돌아다녔다. 가끔은 목마도 태우고 업어도 주었다. 아버지가 절대 하지 않는 사랑을 나는 막내 삼촌에게 듬뿍 받으며 자랐다. 삼촌은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고 내가 하는 특출한 행동은 전부 비범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이 세상에서 든든한 내 편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학급 신문 만들기에 푹 빠진 적이 있다. 그 때는 인쇄기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먹지에 대고 하나하나 적거나 등사기로 밀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학급 신문을 만들면서 재미가 났던 나는, 우리 집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8절지에 2단으로 다양한 글을 편집해 넣었다. 내가 쓴 시도 넣고 만화도 넣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명절에 모인 가족들에게 배부할 예정이었지만, 가족이 많아 적어도 10매 이상은 나와야 했다. 나는 밤마다 원본 종이 밑에 먹지를 대고 적어나갔다. 적고 또 적고를 반복했다. 결국 10장의 복사본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단순하고 무식한 행동이다. 명절에 모인 삼촌들과 할머니와 친척에게 집집마다 한 부씩 선물했다. 다들 신문? 이런 반응이었다.


  그런데 막내 삼촌은 달랐다. 그 신문을 고이 접어 일터 공장 한가운데 붙여놓았다. 그 즈음 삼촌은 마음을 잡고 결혼해 공장장으로 취직도 했고 어린 딸도 두 명이었다. 삼촌은 공장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 좀 심하게는 내가 아마 천재일 거라고도.


  막내 삼촌은 내게 유일한 자존감 재생 공장이었다!




  삭삭 사아악 사각사각.

  나른한 오후, 두꺼운 옷감을 가위로 자르는 소리가 삭 삭 들리고 제법 멋을 부린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깃털처럼 부유하는 먼지를 보면서, 어린 나는 옷감 패턴지를 넘기며 기분 좋은 오후를 보냈다. 양복점 구석 낡은 소파에 앉아 고급 양복지 패턴을 넘기며 손으로 부드러움을 훔치면서 말이다. 숙모님은 가끔 고급 미제 오븐에서 갓 구운 두툼한 쿠키를 탁자위에 올려둔다. 아! 깊은 버터향과 달콤한 향이 어우러진 그 구수한 맛은, 내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쿠키맛이다. 나른하게 기분좋은 가위 소리, 달콤한 쿠키 냄새, 손 끝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옷감의 감촉들. 


  라디오에서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흘렀다. 삼촌은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월남에서 돌아온~~ 박상사"로 개사해서 불렀다. 삼촌은 월남전에 파병되어 상사로 제대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삼촌은 그것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고 가족 모임 때마다 꺼냈다. 그러나 아무도 이제 좀 그만하라는 사람은 없었다.  


  재단사인 삼촌은 가족들이 모두 곰보 철이라고 불렀다. 우리도 어린 시절에는 공감능력 제로인 채 곰보 삼촌이라 불렀다. 어릴 적 수두를 심하게 앓아 얼굴에 곰보 자국이 평생 붙어있었다. 그래서 아마 일찌감치 기술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삼촌은 자신을 부르는 호칭 따위는 별 관심도 없었다. 내가 곰보 삼촌, 하다가 삼촌, 하다가 작은 아버지, 이렇게 호칭을 점점 바꿔도 항상 똑같이 "응" 이었다.


  양복점. 

  나는 책방보다 더 좋아하는 공간이 사실 양복점이나 의상실이다. 물론 어린 내가 옷을 맞추러 가는 일은 없었고, 다행히 삼촌 한 분이 양복점을 운영했고, 우리집 가겟방이 의상실이었다. 옷감 패턴을 가지고 노는 건 어린 시절 내 오래된 습관이었다. 우리집 안방은 벽면 하나가 모두 책으로 쌓여 있었다. 아버지의 오래된 책을 넘기며 암호같은 글자들을 그림처럼 훑어나가는 것도 기분좋은 취미였다. 그리고 오래된 책에서만 느끼는 그 콤콤하면서도 뭔가 나른한 마치 근사한 융단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데 옷감 패턴은 또다른 신기한 느낌을 주었다. 아주 두꺼운 책처럼 된 옷감 패턴을 턱하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하나 하나 넘기고 있으면, 어느 새 작고 구겨지고 무채색인 내 옷들에 색이 더해지고 무늬가 생기고 레이스가 달린 것만 같았다. 아마도 내 상상력의 원천은 아버지의 책장보다 이 수많은 옷감 패턴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양복점과 의상실.

  이 곳은 아마도 내 상상력 창고가 아니었을까?




  나는 삼촌이 다섯 있다. 지금은 모두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에 없지만, 아무튼 나는 삼촌이 다섯이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과 사람은 어쩌면 이 여섯 명이 어린 시절 내게 보였던 삶의 치열한 전쟁터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오래된 방앗간을 좋아한다. 물론 쌀을 도정하는 방앗간이 아니라, 지금의 떡집을 말한다. 예전에는 명절에 집집마다 쌀을 불려 방앗간에 가져다놓고 긴 줄을 서서 떡을 하곤 했다. 그런 떡집 말이다.


  시골에서 떡집을 하는 삼촌이 있었다. 명절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집에 줄을 섰고 삼촌은 어머니 말씀처럼 떡을 기가 막히게 뽑아냈다. 간이 딱 맞다고도 했다. 가끔 시골에 놀러가면, 삼촌은 커다란 기계에 불린 쌀을 넣고 요술쟁이처럼 막대기를 휘두르며 큰 기계를 탁-치곤 했다. 마치 주문을 외는 사람처럼. 그러면 아주 얌전하게 하얀 종이처럼 쌀가루가 펴져서 내려온다. 사각 틀에 그것들을 넣고 콩이랑 팥들을 켜켜이 쌓아 무시무시하게 큰 아궁이 위에 올렸다. 삼촌은 그 커다란 틀을 서너 개씩 거뜬하게 들었다. 솥에서 나는 연기로 자욱한 떡집 사이로, 다 된 떡 시루를 들고 나타나는 삼촌은 마치 알라딘에 나오는 지니 같았다. 그런데 욕심 많은 지니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서 자식 넷을 키우니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떡집 삼촌이 갓 쪄서 수북하게 쌓아주던 그 떡 맛은, 달고 짜고 경이로웠다. 온통 주름투성이에 거무잡잡한 삼촌 얼굴은, 환한 웃음과 찐한 짜증 그 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간이 잘 된 떡처럼.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떡집을 갈 때마다 느낀다. 그래서인지 포장 떡을 주문할 때도 가끔 그 떡집에 직접 가서 안을 구경하는 취미가 있다. 예전같진 않지만 그래도 매장 안에는 떡을 만들어내는 현대식 기구들이 있다. 분주하고 열정적인 사장님은 꼭 거기 그대로 서 있곤 한다. 어릴 적 삼촌의 모습을 닮은 누군가가. 나는 그 누군가를 보기 위해 가는 것이다. 지루하고 감사를 모르는 내 삶에 채찍을 하기 위해.




  시골 군불을 뗀 방은 살이 델 정도다. 나는 그런 시골 집을 좋아한다. 그 시골집에는 할머니가 허약한 삼촌을 데리고 평생 살았다. 삼촌은 집 근처 저수지에서 가끔 물고기도 잡고 마당에 닭도 키우고 나무로 조각을 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평생 아픈 손가락이었던 삼촌이다. 


  초등학교 무렵, 논바닥이 얼어붙은 겨울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튀김이며 도넛을 만들어 가득 들고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할머니집으로 향했다. 할머니집은 방앗간에 매표소까지 하던 삼촌집에서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했다. 어린 아이들 걸음으로는 더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나는 그 추운 겨울이 가끔 생각난다. 어머니는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까. 언덕 하나 지나도 나오지 않고 고개 하나 꺾어도 나오지 않던 그 아득했던 할머니집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그렇게 힘겨운 걸음으로 도착할 즈음, 삼촌은 고갯마루에서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닭을 삶아놓고 동생들을 위해 팽이를 깎아놓곤 했다. 


  나는 할머니집 안방의 쿰쿰한 냄새를 사랑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구들막에 청국장 항아리가 곱게 덮혀있고 밥상 가득 시장을 채울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동생들과 내가 입가를 묻혀가며 먹어대면 할머니는 빠진 이 사이로 헐 헐 웃었고 삼촌은 동생들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는 가져온 음식들을 펼치며 삼촌에게 이것 저것 권했다. 어머니 눈에 삼촌은 별처럼 아련했나 보았다.

 



  긴 시간 나는 유용하지 않은 뭔가를 사랑하는 허망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한 모든 것은 사람이었다.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 살아냈던 그들의 영혼과 진심과 뜨거움을 나는 사랑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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