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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 May 28. 2024

까  피  아

단편소설

 * 까피아: cavia. 네덜란드어. 일종의 실험용 동물. 모르모트(marmotte) 또는 기니피그(Guinea pig). 



  거대한 막 껍데기다.     

  눈을 감고 잠이 드는 찰나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한 컷 영상.      

  유연성과 견고성을 다 갖춘 거대한 비눗방울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은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잠이 들기 직전, 반복적으로 리뷰되는 머릿속 필름 한 조각.      

  아주 어릴 때부터 자주 토했다. 어지럼증도 심했다. 잠을 청하기 직전에 온 방안이 빙글빙글 돌면서 눈앞에서 스파크가 터졌다. 의사 말대로 성장기 빈혈인 줄 알았다. 


  사춘기 때는 멀미가 심했다. 오래된 고철 특유의 냄새만 맡으면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쓰러졌다. 친구들 말대로 멀미인 줄 알았다. 


  매번 듣는 소리는 사내 녀석이... 였다. 대학 때는 술이 빈혈과 멀미를 다 뒤섞어 버렸다. 어차피 어지럼증은 고질병이 되었고 술이라도 퍼마시며 더 어지럽게 만들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적당히 효과가 있었다. 술병인지 어지럼증인지 멀미인지 분간이 가지 않게 되어 버렸으니까. 


  오래 혼자 살면서, 내 하루를 스스로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점점 의식은 또렷해져 갔다. 매일 밤 눈 감을 때마다 한 컷 영상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 그렇게.


  그래도 잠을 청했다. 내일을 위해. 꿈을 위해. 미래를 위해. 내 긍정적인 삶을 위해.     


  평소보다 조금 늦은 아침이다.

  급하게 세수와 양치를 하고 지난밤 퇴근길에 미리 찾아 둔 셔츠와 양복을 꺼내 입었다. 스타일이 살아있다.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를 맨다. 멋지다. 냉장고 속 보양식 즙 한 팩을 뜯어 후루룩 마셨다. 지갑을 가방에 챙겨 넣고는 방안을 눈으로 한 번 스캔한다.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현관 바닥에 조간신문이 떨어져 있다, 어김없이. 신문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조용한 복도 위로 구두 뒤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딱 딱 딱. 

  딱따구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 같다. 벌써 닳았는가 보다. 


  띵 - 

  엘리베이터 도착.

  오전 07시 30분.

  대한민국. 서울시. OO시. OO구. OOO오피스텔 입구.


  지하철을 탔다. 육중한 기계음과 레일 위를 긋는 마찰소리. 급하게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출근길 군중들 발소리. 소총 부대에서 퍼붓는 총소리 같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발 리듬으로 내 옆을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탁-탁 타 탁- 탁.      


  리듬이 엇 나거나 느린 사람들은 무빙워커에서 뒤로 밀리기나 한 것처럼 내 뒤로 점점 빠져버리고 빠른 리듬을 타거나 급한 사람들은 내 앞으로 춤을 추듯 빨려 나간다. 

  나는 걸음을 유지한다. 목적지. 코인. 노선. 일정 시간.      

  완벽하다. 일곱 시 오십오 분에 정확하게 목적지 지하도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순간 방향을 턴- 해서 100m 걸어가서 우회전. 다시 50m 전방. 이십 오 층 건물. 그 가운데 십구 층이 근무지다.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 끝 내 방까지 걸어가서 책상 의자에 앉는다. 여덟 시 삼분.      

  정확하다. 동료가 들어온다.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 사이 컴퓨터를 부팅하고 프린터기 연결선 확인하고 사무실 전화기 새로운 메시지를 열람한다. 그러면서 동료의 농담을 응대한다. 파스타. 점심은 파스타로 결정했다. 더치페이. 동료는 거의 십 분 정도의 시간을 소요한 후 나간다.      


  점심 식사 시간은 정오 열두 시. 지금부터 세 시간 이십 분 후.      


  그 사이 오전 업무는 산더미다. 소소한 열 건과 보고서 한 건이다. 전부 처리하고 점심을 먹어야 한다. 오후에는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오전 업무를 오후로 넘길 수는 없다. 지금부터 이 사무실은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기계음과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와 통화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세 시간 이십 분 동안. 오전 약속된 방문객은 없다. 온전히 업무 시간이다. 


  자, 전투 준비.          

  정오 열두 시.


  동료가 문을 열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달궈진 팬 같다. 오전에 계획했던 업무 전부 처리했다. 


  휴-. 

  힘든 전투 후 남은 잔여물은 하나 있다. 행사 때 찍은 캠코더를 점검하다가 화면이 겹치는 것을 발견했다. 뒤처리는 퇴근 후. 오후 전투 후에도 또 몇 가지 잔여물이 남을 것이다. 그런 것을 다 긁어모아 퇴근 후 처리.      

  - 저녁에 기술지원팀과 회식 예정이라네!      


  오늘 하루 일정은 이제 전부 나온 셈이다. 오후 업무를 끝내고 퇴근 후에는 잔여 처리 업무를 처리하고 한 바퀴 돌다가 회식 장소에 가서 식사 겸 간단한 술자리를 하고 집으로 향한다. 따뜻한 목욕통 속에 온몸을 담글 그 시간까지.     


  파스타 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벌써 우리 팀 몇몇이 와서 앉아 있다. 동료는 그들에게 손짓을 해 보이고는 다른 테이블로 나를 인도한다. 눈앞에 녹조가 끼었다.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자주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마주 앉은 동료 얼굴이 초록색이다. 서서히 연해진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 주말에 데이트 안 해?     


  동료는 이혼한 지 오 년 차다. 주말마다 상대를 바꿔가며 즐긴다. 내게도 그런 생활을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내 취향은 아니다. 결벽증 같은. 아무나 손대는 것도 싫고 아무에게 만져지는 것도 싫다. 동료는 인근 글램핑 장이나 리조트나 펜션을 두뇌 속에 다 꿰고 있다. 가끔 나는 그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 질 때가 있다. 비슷한 장소를 매번 반복적으로 다니는데도 한 번도 같은 장소에서 예전 데이트 상대와 마주친 적이 없다. 그의 말로는 원을 그리며 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없이 반복되는 그 사이클이 울렁증 나지 않는 그가 나는 정말 신기했다. 상대가 다르면 같은 장소여도 느낌과 행위와 말과 모든 것이 모험하듯 달라진다고 말한다. 어떤 여자는 펜션의 야외 수영장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가 하면, 어떤 여자는 수영장 물에 발가락 하나 안 담근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영장 물을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는 보통 창백하고 말랐으며 섹스를 할 때 지나치게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한다고. 반대로 수영장에 정신없이 달려드는 여자는 보통 가무잡잡한 피부에 섹시한 외모지만 막상 섹스를 할 때는 긴 시간 오래 애무해 주기를 바란다고.      


  같은 장소, 같은 시간, 다른 사람, 다른 느낌. 가능할까?     


  동료는 해물 파스타를 주문했고 나는 까르보나라를 주문했다. 마늘빵도 주문했다. 음료는 레몬 에이드 두 잔. 천천히 음미했다.           


  정오에서 오후 한 시. 


  온전히 나만의 시간. 주문이 조금 밀려 기다렸지만 식사가 끝나면 이 삼십 분 정도 거리를 거닐 수 있을 것이다. 동료와 담배를 물고 나란히 걸으며 잡담하는 것도 좋고 혼자 산책하는 것도 괜찮다. 벌써 가을이니 길 옆 공원길이 좋을 것 같다. 동료는 벌써부터 주말 계획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 이번 주말에는 바닷가 코스라고 한다. 키가 백칠십 센티미터에 전문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 동료는 벌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하룻밤 멋지게 보낼 바닷가가 보이는 풍광 좋은 호텔 객실까지 예약해 두었단다. 와인도 한 병 주문해 두었다고.      


  부러웠다. 그래도 부러울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그저 부러울 정도. 막상 내 삶은 아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 한 사람을 위해 부드러운 침구가 놓인 호텔을 예약하고 최고급 와인을 주문하고 갓 구운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싶다. 한 사람 만에게 평생을 그렇게 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은 아직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언제쯤 나타날지 어디쯤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더 난감한 일은 어떻게 알아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지도. 그래서 일정 시간 지난 후부터 아예 그 한 사람을 기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내 운명에는 그런 행운은 없다고 생각한 지 이미 오래다. 대신 좋은 직장과 나를 대신해 연애를 만끽하는 동료와 좋은 집이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이 욕심이 과하면 과욕으로 오장육부가 썩기 시작한다. 나는 내 오장육부를 사랑한다. 썩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래서 적당한 욕심은 머릿속에서 빼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파스타 전문점에서 열두 시 삼십사 분에 나섰다. 


  동료와 나는 식당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공원 쪽 방향으로 걸었다. 처음에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물든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주말에 만날 여성은 바다를 보고 환성부터 지를까, 먼저 뛰어들고 볼까, 아니면 멀리 백사장에서 관망만 할까? 저녁 회식에서 윤 이사는 바지를 입고 나타날까,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나타날까? 이번 주말까지 합하면 동료의 성 경험은 몇 번째가 되는 것일까? 이런 사소한 일상을 입에 오르내리며 갈림길까지 걸었다. 거기서 다시 돌았다. 나는 다시 현기증을 느꼈다. 동료는 휘청거리는 내 왼쪽 팔을 잡아주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감지했다. 내가 가끔 현기증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끔 허공에 대고 양팔을 휘저으며 뭔가를 걷어내려는 것처럼 모양새를 취한다는 것도.     

 

  사실 서로 가까워진 계기가 바로 이 휘저음 때문이었다.      


  오 년 전 다른 직장에 다니던 나에게 콜이 왔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첫 출근 날. 이십오 층 건물을 아래에서 한참 올려다보다가 십구 층으로 올라왔다. 하루 종일 목이 갑갑하고 눈앞에 막이 하나 있는 것처럼 어질 했다. 아니 뿌옇게 보였다. 오전 내내 십구 층을 돌면서 업무 인계에 인사에 정신없이 다니다가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두어 시경에야 비로소 혼자 있게 되었다.      


  내 방. 내 사무실. 나는 허공에 양팔을 허우적대며 뭔가 모를 그 막을 걷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힐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동료가 문을 열고 환한 미소와 함께 들어왔다. 허공에서 마음껏 놀던 내 양팔과 양손은 그대로 멈췄다. 동료는 내 동작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조금 멋쩍어 든 팔과 손을 그대로 공중에 대고 털어댔다.      


  - 스트레칭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다가와 따라 하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훤칠한 키에 도시 맨 다운 하얀 살결을 가진 동료가, 그것도 역 삼각이 완전한 구도를 이루는 사내가 긴 팔을 들어 공중에 털어대는 꼴이라니. 순간 미안함이 치밀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하던 동작을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해 주었다. 눈앞에 자꾸 얇은 막이 펼쳐진 것 같아 걷어내는 중이라고. 동료는 내 귀에 속삭였다.     


  - 저는 어릴 때부터 그랬는걸요!     


  그날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점심시간이면 동료는 어김없이 내 방 문을 노크했고 서로의 사생활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동료는 나와 달랐다. 일과 사랑을 전부 즐겼다. 동료는 여자와 섹스를 할 때 그 시간만은 막이 걷히는 느낌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느낌일 때는 어떤 기분이냐고 되물었더니, 머리가 푸른 호수에 씻기는 느낌이라고 한다. 푸른 호수에 씻기는 느낌. 그런 기분을 느끼자고 아무 여자 하고나 뒹굴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동료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어차피 죽으면 썩어버릴 몸뚱이야!     


  나는 동료를 더 빤히 쳐다보았다.     


  - 껍데기란 말이야?     


  동료는 허공에 웃음을 날렸다.      


  - 어차피 손해 볼 거 없는 장사 아냐? 섹스해서 좋고 머리 맑아져 좋고. 

  - 그럼 결국 찾아낼 한 사람도, 서로 껍데기뿐일까? 영혼 없는 껍질…….

  - 막을 걷어야 영혼이 보이지. 빌어먹을!

  - 그러면 그 숱한 여자들과 다 영혼이 통했다는 거야?

  - 잠깐, 아주 잠깐씩.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다고 그 단순한 말만 믿고 무턱대고 동료의 방법을 따라 해 볼 수는 없었다. 또 그렇다고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그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서서히 지쳐 갔다. 점점 힘이 빠졌다.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건너 다시 직장으로 올라갔다. 동료는 잠깐 화장실에 갔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때.     


  아!

  눈부신 여자. 한 사람.


  내가 찾는 한 사람이다. 분명했다. 나는 그녀 뒤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따라갔다. 무작정.     


  그녀는 아이보리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 조금 밑 치맛자락 아래로 늘씬하게 내려온 종아리가 적당한 높이의 힐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허리께에서 일정하게 리듬을 타고 흔들리는 멋스러운 스타일의 가방도 그녀의 안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깨선까지 찰랑대는 머릿결. 그녀는 건물을 빠져나가려고 입구로 향하고 있다. 나는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붙어 따라갔다. 


  동료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경로였다. 그녀는, 얼마 전 내가 점심 식사를 하고 나왔던 그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더 바짝 따라갔다. 벌써 오후 업무 시간이 지나 버렸다. 하는 수 없다. 나는 천천히 파스타 집 유리창으로 홀 안을 응시했다. 그녀는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      


  남자. 키는 적당히 큰 편이고 옆선이 꽤나 핸섬한 깔끔한 셔츠에 정장 차림을 한, 어디서 많이 본 셔츠에 정장. 끈이 긴 구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 홀 안에 있는 그 남자.     


  그 남자는…… 바로…….     

  나였다!     


  허공에 양팔을 마구 허우적댔다. 유리창이 더 두꺼운 막에 덮여 눈앞이 온통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안이 잘 안 보였다.      


  분명히 나였다. 내 얼굴. 이렇게 길바닥에 서서 바람 풍선처럼 양팔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는 그럼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벌써 그 한 사람을 찾아 식사를 하는 사이까지 발전한 저기 저 사람은 또 내 안의 누구인가? 또 다른 나인가?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대로 미친 듯이 사무실로 뛰어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창을 전부 열어젖혔다. 숨이 막혔다.


  헉. 헉. 헉.

  그때, 동료가 들어왔다.      


  - 파스타 하루에 두 번 먹으니 맛있어?     


  나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동료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동료는 의아한 듯 장난기 있는 눈으로 나를 말끔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점점 동공이 확대되면서 놀라움과 분노와 두려움들이 뒤섞인 눈빛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동료 얼굴은 천천히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곧바로 태연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웅얼거린다.     


  - 축하해. 인생에 한 사람 찾은 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 과연 무언가?     


  - 관리 잘해라. 내가 훔쳐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던 걸!     


  동료는 손을 흔들며 나갔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수신이 한 통 있다.      


  ‘한 사람’     


  그럼 내가 그 한 사람을 정말 찾았다는 말인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 목소리였다. 전화기를 타고 파스타 전문점 안 소음들이 여지없이 들어왔다. 나이프와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 잔 부딪히는 소리, 이야기 소리, 잔잔한 클래식 음악소리. 불과 얼마 전 그 자리에서 들었던 기타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 사내 목소리 …… 아니, 내 목소리!      


  - 누구야?     


  내. 목. 소. 리.     

  나는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지러웠다. 천장이 갑자기 빙글빙글 돈다.     


  의무실에서 일어난 시각은 오후 두 시 이십 이 분이었다. 동료가 잠든 나를 지키고 있었다. 눈앞에 막이 더 두꺼워졌다. 이제 시야가 온통 뿌옇다. 동료는 돌아오는 복도에서 내게 약을 한 알 주었다.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물도 안 마신 채 입 속에 넣고 자근자근 씹어 삼켰다. 몹시 쓰다. 진저리 칠 정도로. 자리에 와 앉았을 때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씻긴 듯한. 뒤늦은 업무 처리를 위해 오후에는 자리도 떼지 않고 일을 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다. 나 아닌 내가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분명 무슨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 한 사람을 다시 꼭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간단한 발표 내용 정리와 보고서 작성과 몇몇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오후를 보냈다. 아무도 오지도 가지도 않았다.       

   

  오후 여섯 시 정각.     

  마지막 서류 작성 문서의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모든 일과를 마쳤다. 해야 할 일도, 해서는 안 될 일도, 다 끝나는 순간이다. 오 분 정도 지나자 복도가 시끌벅적했다. 퇴근이다. 동료가 내 방 문을 활짝 열었다. 그 틈으로 지나가는 옆 방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일 곱 시까지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한다.     


  여기서 걸어서 십 분 거리. 그 사이에 구두 수선을 하고 전자 상가에 들러 캠코더 수리를 하고 약속 장소로 향하면 된다. 이제 어지럼증도 사라졌다. 그건 이상한 무의식적 반응이었을 것이다. 환상을 본 것이지. 그런데. 잔상에 남는 미심쩍은 한 가지.      


  핸드폰을 꺼내 다시 연락처를 확인했다.


  한 사람.

  연락처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잘못 본 것이다. 환청처럼 환상을 본 것이지.      

  나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구두 수선점 안은 어두웠다. 의족을 한 오십 대 사내가 내 구두에 징을 박아 준다.      

  - 끈이 낡았네. 갈아 드릴까?     


  갈지 않고 새 끈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천천히 갈아도 상관없었으니까. 이제 구두에서 딱따구리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걸을 때마다 징 징 거리는 울림이 있다. 딱 딱 대신 징 징. 하는 수 없다.     

  전자 상가는 벌써 파장 분위기였다. 단골로 가는 집 점원은 짬뽕 국물을 후루루 마시고 있었다. 그 집은 늘 늦게까지 문을 연다. 내 캠코더를 보더니 화면을 조정해 주었다.      


  - 또 문제 생기면 언제든 오세요!     


  언제든. 밤이든 낮이든. 

  다시 언제든 언제쯤 여기를 오게 될까?      

  한 손에 캠코더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삼 분. 이탈리아 레스토랑까지 딱 삼 분이면 간다. 지금 시각은 여섯 시 사십 이 분. 좀 이르다. 그렇다고 거리를 배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가는 수밖에. 그때 길옆에 트럭이 한 대 보였다. 잡화를 파는 트럭이었다. 잘 되었다. 저기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들어가면 될 것이다. 많은 잡화들이 있었다. 등산용품에서부터 간단한 주방 용품까지. 그 가운데 캠핑용 접이식 의자를 하나 발견했다. 꽤 높았다. 값을 치르고 그것까지 들고 걸었다. 이제 양손에 물건을 다 들었다.     


  수리된 캠코더와 수선한 구두와 새 구두끈과 접이식 의자까지.

  완벽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안은 시끌벅적했다. 

  뷔페식으로 수 십 종의 파스타와 소스. 싱싱한 해산물 요리들. 다양한 형태의 피자. 즐비하게 늘어선 샐러드들. 역시 윤 이사는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왔다. 그 짧은 시간에 화장까지 고쳐 온 모양이다. 오십 넘은 여자로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섹시함이다. 동료는 자리에 없었다. 늦는 모양이다. 나는 접시를 들고 다니며 이것저것 담았다. 안쪽 긴 휘장이 쳐진 홀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나는 호기심에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바깥 홀보다 더 아름다운 실내 장식과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곡. 입구에 쳐진 긴 휘장을 한 손으로 살짝 걷어 보았다.      


  쨍그랑.     


  접시를 놓쳤다. 그 소리에 홀 안 사람들이 일제히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그 한 사람이, 내가, 나를 보고 있다. 거기에, 그 아름다운 공간에서 그 한 사람 손을 잡고 내가 그렇게 머물러 있지 않은가? 음악은 다시 울렸다. 나를 못 본 것처럼. 그들은 다시 떠들고 웃어대며 음식을 먹었다.        


  나는 또다시 양손으로 허공을 휘저어대며 비틀거리면서 뛰어나왔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구토를 했다. 그때 거리 반대편에서 동료가 뛰어왔다. 동료는 회식 시간보다 많이 늦었다. 길에서 허우적대며 멍하게 서 있는 내 꼴을 보더니, 양팔을 꽉 붙잡는다.     


  - 너를 봤어?     


  동료는 다급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나는 놀라서 동료를 쳐다보았다.     


  - 어떻게 …….

  - 젠장!

  - 이게 …… 왜 …… 내가 …… 똑같은 내가 …….

  - 정신 차려!     


  동료는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 아직도 몰라? 너나 나나 …… 우린 인간들이 만든 껍데기야! 실험용 인간! 까피아! 도시 재생 위원회가 만든 복제인간!

  - 아니야! 난 부모님도 있고 …….     


  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부모님이 정말 있었던가, 의식 속에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     


  - 절대 너를 만나면 안 돼! 우리 까피아는 원판 인간을 만나 눈을 마주치는 순간, 무의식에 내장된 시스템이 작동해서 자살할 수밖에 없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동료는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내 어깨를 미친 듯이 흔들어댄다.     


  - 방법을 찾아야 해!      


  끝났다. 이제 다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 집으로! 


  지하철 입구까지 동료가 배웅해 주었다. 낮에 건네준 약을 한 알 더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약을 입 안에 쑤셔 넣고 미친 듯이 씹어 먹었다. 그래서일까? 지하철을 타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아주 깊이.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다음 역에서 내려야 했다. 지친 몸을 끌다시피 겨우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집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너무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업무는 모두 수행했다. 잘했다.      


  그런데 …… 내가 까피아라니 …… 설마 …….     


  현관문을 열자마자, 캠코더와 접이식 의자를 내팽개치고 침대에 쓰러졌다. 잠이 들었다. 아니 든 척했다. 이렇게 숨죽이고 누워 있을 때만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으니까. 오직 객관적이고 능동적일 수 있는 유일한 내 시간이니까.      


  그 한 사람. 훔치고 싶다. 가지고 싶다. 동료는 지금쯤 레스토랑에서 또 다른 여자를 만나 호텔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매일 밤. 그렇게. 여자와 교감해서 무의식을 통해 껍데기를 바꾸어가는 그 고통. 동료는 살아남기 위해 지금까지 수 백 명의 인간 무의식을 통과해 이동했다고 한다. 여자 무의식에 남은 잔여물 같은 인간 속으로 파고들어서... 그것은 형태의 변화 없이 완전범죄가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아무도.      


  나는 그가 아니다.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시간이 없다.     


  나는 시체처럼 움직임도 없이 침대 속에 빠져들었다. 처음 한동안은 거대한 막 껍질 속에서 허우적대는 내 실존이 리뷰되었다. 무한 반복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다른 영상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일생에 한 번도 보거나 지나친 적이 없는 사람들과 낯선 장소가, 무의식을 타고 영상으로 들어온다.      


  도대체 왜? 누가? 


  무의식이라는 장치를 통해 마치 무선 통신을 하는 것처럼 무의식 통신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나에게...      


  완벽한 하루를 살아내고 나면 그날 영상은 사라진다. 하루 일과 가운데 지키지 못한 일이나 흐트러진 일이 있는 날은 어김없이 짧은 한 컷 영상이 무의식을 뚫고 들어온다. 짧은 고통과 짧은 고독과 심장을 파고드는 허무를 동반한 채. 눈을 감은 채 운 적도 많았다. 가슴속을 파고드는 허무가 너무 고통스럽고 아려서...     

 

  그러면서 얼마 전부터 나도 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오늘 같은 일이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내가 까피아라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면서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그래, 인정하기 싫었다. 결국 올 것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또 다른 나 자신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떠날 시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속히 떠나야 한다. 동료가 소리 지르지 않아도....  

  방법을, 찾을 것이다. 반드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순간. 폰이 울렸다.  

  그 한 사람. 


  내 폰 연락처 저장에 ‘한 사람’이라고 뜬다. 도대체...

  다시. 연락처가 뜬다. 왜 다시 뜬 것일까? 왜? 또 다른 나와 지금의 나는 연락처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왜?

  그 한 사람이 나와 또 다른 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전혀!      


  - 집으로 갈게요. 주소 찍어 줘요!     


  나는 급하게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료는 아직도 파티장이었다.     


  - 우리는 일종의 복사기와 같다! 네 본판 인간의 모든 핸드폰 저장과 메일 등은 너에게도 똑같이 자동적용이 되지! 그러나 네가 입력하는 저장은 그쪽에 전송되진 않아! 도시 재생 위원회 녀석들의 실수가 바로 이거다! 친구! 행운을 빈다!     


  이거다! 역시 기회는 반드시 온다.


  밤 아홉 시 이 분. 내 인생에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한 사람이 내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눈이 부시게 …….     

  나는 들어서는 그 한 사람을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그리고 온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 한 사람은 놀라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회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없다.

  나는 그 한 사람을 소중하게 안아서 침대로 갔다. 그 한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수 십 번 되뇌었다. 나는 말을 아꼈다. 깊은 키스와 사랑의 감정이 반복될수록 머릿속 무의식 어딘가에서 희미한 물체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점점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무의식 저편 캄캄하게 닫혔던 막이 걷히고 있었다.

  조금씩 …… 조금씩 …….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터져나갈 정도로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깨져버릴 것 같다. 

  아-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고통스러울수록 더 뜨겁게 키스를 했다. 놓칠 수 없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아! 이러다가 머리가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마지막 탈출구다.      

  막이. 걷힌다. 

  무의식 속 막이… 서서히…….          


  정신을 차려보니 고급 세단 안이었다. 멀리 동쪽 하늘에 샛별이 천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옆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운전석에 예의 바른 운전수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내 어깨를 베고 잠이 들어 있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보았다. 머릿속이 맑고 깨끗하다.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번을 반복해 보았다. 맑다. 의식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살았다!     

  완벽하다.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아마 지금 쯤 까피아로 뒤바뀐 ‘인간인 나’는 머리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바뀐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처음 내가 까피아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인정하기 싫어 죽도록 노력했던 그 고통! 애써 죽이지 않아도 된다. 오늘 밤 안으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완전한 자유다!        


  

  안녕하십니까?

  UCN의 OOO입니다.

  도시 재생 위원회에서 만든 실험용 복제인간‘까피아’ 2009호가, 새벽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자살한 체 발견되었습니다. 접이식 의자를 사용하여 샹그리에에 구두끈을 연결한 채 목을 맨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살 경위와 방법은 다른 까피아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로써 실험을 통해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까피아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의 자살 방식과 시간과 공간은 모두 앞선 까피아들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도시 재생 위원회는 지금까지 연구한 까피아들을 통해 도출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신년부터 인간 무의식을 통한 도시 재생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본 위원회는 인류에게 가장 적합한 무의식 공간을 인간의 두뇌에 저장하는 프로그램 개발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 사건은 …….          



  나는 차창을 내려 대형 전광판 뉴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완벽하게 다 끝났다. 지금부터 나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나와 그녀를 태운 고급 세단이 대형 전광판 아래를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이라 차도는 한산했다. 그때 반대편 차로에 멋진 스포츠카 한 대가 속도를 최대한 줄인 채 지나가고 있었다. 내 동료 ‘진’이었다. 진이 멋진 차림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태운 채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부시게 찬란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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