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안식년'을 돌아보며 '나를 위한 커피 한 잔'
추억이 스며든 사물들이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 머금고 있는 기억은 짙은 향을 풍긴다.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노래, 특정 여행지를 떠올리게 하는 냄새처럼 우리의 오감은 각각이 기억저장소 역할을 하고 있는듯하다.
쌉싸름한 탄내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자, 이제 열일할 시간이야’라며 나를 깨우는 일종의 트리거 같은 존재다. 수면 부족과 체력 고갈로 출근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던 날에는 탕비실 커피머신 대신 사무실 1층에 있는 스타벅스로 뛰어가 커피 수혈을 했다.
피곤한 날일수록, 공복 상태로 몸 안이 비어있던 시간이 길수록 카페인의 힘은 강력했다. 손끝 발끝 혈관까지 온몸으로 퍼져나간 카페인이 세포들을 깨우는 쾌감. 커피 한 모금에 눈이 번쩍 떠지고 또 한 모금에 비로소 피가 돌기 시작했다고 하면 약장수 멘트인가 싶겠지만, 카페인 중독자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피로회복에 직방인 자양강장제 겸 만병통치약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금도 집중하고 싶을 때, 단시간에 최대 효율을 뽑아내야 할 때면 본능적으로 산미 없는 탄 커피를 찾곤 한다.
오늘은 유독 탄 맛 강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땡기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섰다. 자리를 잡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순간, 타임슬립이 일어나는 듯했다. 출근해서 정신줄 바짝 잡고 열일하던 시간들, 수년간 반복해온 나의 하루들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퇴사한 지 딱 일 년을 넘긴 오늘. 귀신같은 촉이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전, 나의 셀프 안식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내세울 건 없지만 나에게 부여한 안식년을 나름 잘 보냈다. 내 안의 금쪽이를 키우듯이 나를 돌보는 데 집중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즐거운 순간, 해보고 싶은 일들을 발견하며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생겼다. 현실도피처를 찾듯 멍하니 보기 시작했던 축구 경기를 이제는 찐덕후 모드로 온전히 즐긴다. 꼭 한번 가보고 싶던 미국에서 횡단 열차를 타며 각 주의 자연을 원 없이 구경했고, 겨울의 뉴욕을 만끽하며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완료했다. 갑작스레 치러진 재·보궐 선거 덕분에 체육관에서 진행한 개표도 참여할 수 있었다.
현생에 얽매이는 것 없이 관심이 가는 문화·예술·교양 분야 콘텐츠를 마음껏 탐닉했다. 인풋 없이 아웃풋 내기에 급급한 일상 속에서 소모되고 고갈되는 게 항상 불만족스러웠는데, 마음껏 늘린 인풋 덕분에 그간의 결핍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됐다. 말라비틀어졌던 인류애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멈춰있던 정서 지능도 조금씩 높아지는 중이다.
자동차에 휘발유를 만땅 채우듯, 빈속에 카페인을 주입하던 나에게 커피는 무조건 아이스, 카페인이 가장 빨리 퍼질 수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뿐이었다. 셀프 안식년 동안 나의 커피 선택지는 다양해졌다. 요새는 직접 원두를 갈고 드립커피를 내려 마시기도 한다. 집안 전체에 퍼진 원두 향으로 몸을 깨우며 커피 한 잔이 주는 여유를 즐긴다. 산미를 품었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서서히 퍼지는 카페인에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때로는 텐션을 바짝 올려야 하는 날도 있고, 몸과 마음에 온전한 휴식을 줘야 하는 날도 있다. 살면서 어떠한 날을 만나더라도 '나를 위한 오늘의 커피'는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나의 기분, 나의 상태를 살펴보며 나에게 필요한 최적의 커피를 고를 수 있다면, 어떠한 날도 꽤 괜찮았던 하루로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