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뉴욕 vs 현실 뉴욕
때는 바야흐로 1998년 성공적 커리어를 갖고 뉴욕에서 화려한 삶을 사는 네 명의 여성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샬롯, 사만다, 미란다 그리고 캐리. 9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을 사람도 있지만 현재 3040 세대 가슴속에 남아있는 섹스 앤 더 시티. 전 세계 많은 여성, 게이 남성들의 패션 바이블이 되고 연애 지침서가 되었던 이 드라마는 미국 티브이 방송사 HBO(현재 대표 드라마는 '왕좌의 게임')의 안방마님 격 드라마이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 십오 년도 더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섹스 앤 더 시티는 나의 최애 인생 드라마이다. 캐리와 그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를 도와준 과외 선생님이었고, 대학 때는 나에게 미국 취업을 적극 장려하던 인생 선배였으며, 훗날 미국에서 거친(?) 인생을 살아나갈 때에 지친 마음 위로해주는 심리 치료사였다. 수십 번도 더 넘게 봤지만 신기하게도 볼 때마다 내가 처한 사항에 따라와 닿는 구절이 달랐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캐리의 행동이 이해 간다던지 마냥 멋져 보이던 사만다라는 인물이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다소 힘든 캐릭터라는 깨달음 등등 모든 에피소드, 캐릭터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다르게 다가왔다.
몇 주전 시즌 1부터 정주행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스무 번째 정주행 즘 되지 않을까.
인생이 참 신기하게 풀리는구나 생각하며 픽하고 웃음이 났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티브이 드라마 속 현실이 내 현실이 되다니. 물론 살고 있는 동네, 연령대, 그리고 기혼 여부만 비슷하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지만 현실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 킬링 포인트였다. 덕분에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 속 허구와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오며 드라마를 좀 더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단, 철저히 내 주관에 의한 논점이라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한다.)
네 주인공의 화려한 뉴욕 생활을 그려내며 섹스 앤 더 시티는 이른바 전 세계 인기 드라마로 등극한다. 이 드라마 덕에 캐리의 삶을 꿈꾸는 소녀, 게이 소년들이 뉴욕을 찾았고 드라마에 소개되었던 레스토랑 바들은 뉴욕의 ‘핫 스팟’으로 자리매김하며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만 보면 뉴욕은 트렌디하고 고급스럽고 고상하다. (일부 사실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사는 뉴욕의 현실은 냉정했다.
일단 캐리의 인생을 살펴본다. 일주일에 한 번 칼럼을 연재하는 칼럼니스트로서 룸메이트 없이 집값 비싼 어퍼 이스트 사이드(Upper East Side)에 살며 한 켤레에 500불이 넘는 마놀로 블라닉, 지미 추를 노점상에서 껌 사듯이 사는 캐리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 드라마가 만들어낸 절대적인 환상이자 허구의 삶이다. 일단, 미국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신문사의 칼럼니스트라고 해봤자 편당 돈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주간 연재의 경우 많이 받아야 연 4만에서 5만 불 정도이다. (한화 약 4천에서 5천만 원) 이 연봉은 뉴욕시에서 싱글 여성이 살기에 절대 풍족한 금액이 아니며 캐리 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향유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녀가 좋은 딜로 아파트를 싸게 얻었고 책도 출판하여 돈을 좀 벌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매 주말마다 바(bar)며 레스토랑이며 마시고 먹고, 한잔에 적어도 15불 정도 하는 코스모 폴리탄을 두세 잔씩 먹고 즐긴다면 그녀의 통장 잔고와 카드 명세서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현실에서 이것이 가능하려면 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부모님이 엄청 부자여서 경제적 지원이 끊임 없거나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통잔 잔고가 마르지 않을 만큼 돈이 있는 경우. 그 외에는 애석하게도 무한 카드값에 허덕이는 빚쟁이들이 되겠다.
이십 년 전엔 스마트 폰도 없었고 온라인 데이팅 앱도 없었을 테니 다들 어디서 사람을 만나나 싶지만 생각해보면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용기 내어 다가가 전화번호를 물어볼 수도 있지 싶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지만 극 중 캐릭터들이 길가다 눈 빛 한번 교환한 남자와 갑자기 불꽃같은 연애를 하거나 같은 남자를 우연히 그것도 여러 번 마주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할까?
물론,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들끼리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본인도 몇 차례 공공장소에서 말을 거는 낯선 남성을 만난 적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정상에서 약간 벗어난 비정상이었다는 것. 어쩐지 약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정상적인 낯선 사람이 말을 경우는 있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처럼 길거리 지나갈 때마다 혹은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는 말이다. 일종에 계 타는 개념이랄까.
뉴욕은 사람이 엄청 많은데 사람 만나기 힘든 도시다. 사람들 모두 한눈을 팔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간다. 커피숖에서도 노트북만 쳐다보고 술집에서도 친구들이랑만 이야기한다. 뭔가 상냥한 혹은 친절한 태도의 낯선 사람이 다가 온다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사기 딱 좋은 케이스이다. 그렇게 뉴요커들은 낯선 사람을 경계한다. 그래서 아무리 잘생긴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건다고 해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저 모두의 바람으로 남을 뿐이다.
사만다 같이 자유분방한 여성이 현실에도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논쟁은 세기의 논쟁이라 할 정도로 그 의견이 분분하다. 뉴욕에 이사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만다와 같은 인물은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의 캐릭터일 뿐이고 현실에서 그렇게 자유분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뉴욕에 이사와 여러 사람을 만나보니 현실에 사만다 같은 사람이 존재하더라. 한국 정서로는 약간 무리가 있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극진보 주의 뉴요커들을 마주하다 보니 사만다가 매우 현실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물론 본인이 연애에 있어서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들며 점점 보수적임. TMI) 2019년의 뉴욕에는 한 명의 상대에만 속박되지 않는 이른바 폴리 가미(Polygamy: Monogamy (일부일처)의 반대 개념으로 여러 명이서 하는 연애 혹은 결혼을 일컬음)도 이제는 매우 흔한 형태의 연애가 되었다.
이런 자유연애도 좋긴 하지만 보수적인 나는 지고지순한 순수한 연애가 더 좋다. 나이가 들 수록 순수한 사랑을 하기가 힘들어서인가. 물론, 미국 사회가 티브이에서 보는 것 같이 성에 있어 한없이 개방적인 나라는 아니다. 미국 사람들도 순수한 연애를 찬양하고 혼전 순결을 존중한다. 단지, 뉴욕이라는 도시가 그것을 좀체 찾아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만... 그런 의미에서 뉴욕은 어쩐지 타락의 도시만 같다.
최근 들어 섹스 엔더 시티를 보며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주인공 모두 삼십 대 중반 미혼 여성이라는 점이다. 결혼에 대해 딱히 로망도 없었을뿐더러 하고 싶은 건 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덕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한 이유도 있지만 결론은 나도 이제 서른 중반(슬슬 후반…)의 싱글 여성이라는 것.
요즘 여자 나이 서른에 미혼인 것이 흠은 아니나 바이오라지컬 클락(Biological Clock) 이른바 ‘임신 가능 연령’을 생각해 보면 ‘어서 나도…’라는 조바심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 만나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든지.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 네 명의 주인공들이 겪는 커리어, 결혼, 임신에 관한 해프닝이 가히 남일 같지 않다. 일에 치여 성공 노력하다 보니 결혼 시기를 놓치거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도 상대방이 별로 흥미 없어하거나 밀고 당기고 또 당기고 밀고하는 사람 관계. 혹자는 이 드라마가 지나친 페미니즘에 근거하여 기센 여자들의 편향된 사고를 투영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적절히 현실적인 듯싶다. 적어도 뉴욕 싱글 여성에 한에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사는 도시는 같아도 내 삶은 전혀 캐리의 삶과 같지 않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화려한 외모의 매력적인 금발 미녀이고 나는 한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일 뿐이니까. 객관적이고 냉철한 교육관으로 길러주신 부모님 덕에 쓸데없는 자기 연민이나 지나친 자기애는 진작에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내가 가는 곳곳에서 브금(BGM)이 흘러나오며 슬로 모션으로 멋지게 뉴욕 한복판을 걸어가는 내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 돌려 쳐다보는 그런 드라마 같은 인생이면 어떨까? 그 드라마 속 주인공은 매일 아침저녁 러시 아워의 전철을 안 타도 될 것이고, 상사의 타박으로 ‘왜 이러고 사나’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행여나 지출이 많은 달에는 커피를 줄여야 하나 고민하지도 않겠지. 그래도 인생 살아보니 그게 서울이던 뉴욕이던 힘든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더라. 하지만 드라마를 보며 위안을 얻는다. 뉴욕에 있는 것 만으로도 섹스 앤 더 시티 절반의 로망을 나는 나름 살고 있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