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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 Dec 26. 2020

권태기에 빠지다.

뉴욕,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아요.

드디어 벗겨졌나 보다. 내 눈의 콩깍지.

주변을 둘러싼 익숙한 풍경, 지겨운 일상, 마치 사랑이 식어버린 남녀 관계에서 상대방을 바라볼 때의 기분.


권태기...?


나는 그렇게 어느 순간 뉴욕과 권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랑이 식고, 그리고 실증을 느낀다. 아, 내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날 이때껏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곳저곳 방황하며, 자리 잡을 만하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길 벌써 몇 번 째인지... 혹자는 딸린 식구 없는 싱글이 누릴 수 있는 호사라며 부러워 하지만, 과연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싶은 생각에 슬쩍 불안해진다.


시작은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이었다. 급작스럽게 증가해버린 코로나 확진자 수로 인해, 올해 3월 초 뉴욕은 코로나 핫스팟이었다. 당시, 180도 바뀌어 버린 뉴욕의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길거리를 지날 때면 관광객, 뉴요커 할 것 없이 발에 치이던 게 사람이었고 밤낮 할 것 없이 일 년 내내 사시사철 북적이던 도시였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고 2주면 끝날 거라 생각했던 재택근무와 도시 봉쇄는 3개월을 넘어 6개월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봄이 만연하고 여름의 절정에 다다른 7,8월은 코로나 이전의 생기 넘치는 뉴욕으로 잠깐 돌아간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름내 확진자 수가 줄었다고는 하나, 백신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는 어떠한 결정도 쉽게 내리지 못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답답한 마음에 뉴욕을 탈출하여 2 개월간 타 도시로 도피도 하였다. 멀리 떠났다 돌아오면 예전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6년 전 뉴욕에 이사 왔을 때, 도시가 주는 마법 같은 기분에 종종 사로잡히곤 했다. 날씨 좋은 날이면 뉴욕은 평생 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고, 까만 밤에 수 놓인 화려한 고층 빌딩은 종종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생동감 넘치고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이는 뉴욕은 게으른 자의 숨겨진 부지런함을 자극하는 도시였고, '이 곳에서 성공하면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실현해보고 싶게 만드는 희망찬 도시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북적이는 레스토랑, 술집들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소리. 길거리 자동차, 공사판에서 들려오는 각종 도시 소음.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엠블란스의 '앵앵'거리는 소리는 뉴욕의 진정한 BGM이었고, 사람 사는 소리, 뉴욕의 소리였다.

그렇게 열 두시가 지나버린 걸까. 마법이 풀렸다. 뉴욕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뉴욕의 각종 소음이 엄마 잔소리보다 더 듣기 싫은 소리가 되었고, 온갖 신경을 자극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예전에는 뉴욕에 살면 응당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 비싼 물가, 거지 같은 날씨, 무례한 사람들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급기야 내가 왜 여기서 무슨 이유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현타가 왔다.

한 때, 뉴욕으로 이사와 십 년도 채 살지 않고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그들을 낙오자라 생각했다. 뉴욕에서 사는 사람은 마치 내구성 테스트를 통과한 야구 방망이와 같았고, 그 강단이 없으면 살아 남기 힘든 도시였다. 때로는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살아남는 내가 자랑스러웠고,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뉴욕은 더 이상 대단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겐. 포기가 하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 다면, 그 건 아니다. 그렇다면 뉴욕이 만만해진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냥 마음이 식어 버린 것이다. 뭐, 내가 뉴욕에 대해 마음이 식었다 한 들 정작 그 누구 하나, 특히, 당사자인 뉴욕은 눈 하나 껌뻑하지 않겠지만.


그간의 사랑도 사실 짝사랑이긴 했다. 나 혼자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고 그렇게 혼자 식어버린 것을. 수십 년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뉴욕과 사랑, 이별 하기를 반복해 왔고, 이 제 나도 어쩌면 이별을 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매일 드는 요즘이다.


그렇게 언젠가 이별을 하는 날이 오면 이별 후의 나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이별을 정말 할 수 있을까?.


덧붙여 부부나 연인 간의 권태기 극복하는 방법이 나한테도 적용될 수 있을까? 권태기를 극복할 만큼 누굴 오래 사귀어본 경험이 전무한 나에게 이런 기분이 생소한 것은 당연하지. 어쩌면 나는 애초에 이 곳을 떠 날 마음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뉴욕이 남자였다면, 연애 고수였겠다는 뚱딴지같은 생각도 해보며... 의식의 흐름을 잠깐 나열해 보았다.


이 모든 것은 뉴욕이랑 관계없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내 인생 전반에 대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던지 간에 이 답답한 터널 속 같은 시기를 지나고 나면 답이 좀 나오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우울감 이면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짜릿함이 공존한다는 것이... 그래서 인생은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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