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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 Sep 15. 2022

난 엄마 같이 안 살래요.

엄마는 24살이었고, 아빠는 27살이었다. 엄마는 당시를 회상하며 아빠는 선 자리에 나갈 때마다 번번이 퇴짜 맞는 노총각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요즘이야 27살에 노총각이 웬 말인가 싶지만 그때는 워낙 다들 일찍 결혼하던 시기였으니…


엄마는 고등학교 때 즈음 부모님 두 분을 다 여의었다. 엄마의 작은 어머니가 주선해 준 자리에서 아빠를 만난 엄마는 선한 인상과 웃을 때 보이는 가지런한 이에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몇 달간의 연애 기간을 거쳐 처음으로 아빠를 따라 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에게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간 날, 서울 달동네를 한 참 걸어 올라가 도착한 집의 살림은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방 세 개짜리 집에 어머니, 몸이 불편한 여동생, 4살 어린 남동생, 이렇게 네 가족이 살고 있었고, 홀어머니에 몸이 약한 여동생이 있는 집안 사정을 알 고 난 후 여자들이 아빠에게 퇴짜를 놓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할머니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을 하여 엄마를 맞았다.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몸이 아픈 여동생에게 어쩐지 모를 측은함을 느끼기도 해, 아빠를 더 보듬어 주고 싶다고 했다.


서막이었다. 30년 가까이 되는 극한 시집살이의 서막.


그렇게 장남에게 시집온 엄마는 이듬해 나를 낳았고, 내가 3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와 고모와 삼촌까지 함께 시댁에서 함께 살았다.


엄마는 시집을 가자마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시아버지의 제사와 명절 때마다 음식을 해 나르기 시작했다. 너무 몰라 무지해서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말했다.


삼촌이 결혼한 후 작은 엄마가 명절마다 일을 도왔다. 혼자 하던 일을 손이 하나 거드니 조금 수월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작은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그 이후 삼촌은 더 이상 명절날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또다시 모든 제사와 차례상은 온전히 엄마 몫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엄마는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요즘에야 한 때는 몇백대 경쟁률까지 올랐던 공무원 시험을 보고 공무원이 되지만, 당시에 서울시에서 반짝 고졸자에 한에 시험 없이 채용을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운이 좋게도 서울시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었고, 그렇게 부모님은 맞벌이를 시작했다.


서른 넘어 직장 생활을 시작한 엄마는 의외의 사교성을 발견하고, 직장 동료와 적잖은 회식에 참여했다. 하지만 회식 후 늦어진 귀가에 아빠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무슨 직장 생활을 그렇게 요란하게 해?”

아빠는 엄마가 회사 끝나고 집으로 곧장 오길 바랬다.


당시에 어렸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왜 늦게 오는 걸까?


나이가 들고 직장 생활을 하고 나서야 엄마가 이해되었다. 엄마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직장에 엄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엄마가 맞벌이를 시작하자 할머니는 다달이 용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돈을 번다고 그전까지 해왔던 시집살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여전히 제사 때면 맏며느리의 역할을 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장을 보고 당일날 전을 부치고, 명절이 돌아오면 차례 준비를 했다. 거기에 일 년에 한 번 할머니 생일상까지 손수 차려 할머니 친구들을 초대하곤 했다.


따지면 분기별 한 번씩 큰일이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30년을 넘게 엄마는 돈도 벌고 시집살이도 하며 평생을 받쳤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때문에 명절이면 찾아 뵐 친정도 없던 엄마였다.

 

엄만 나에게 한 번도 제사상 차리는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명절 이후 설거지를 시킨 적이 없다. 엄마 자신이 전생에 지은 죄를 갚아 나가는 것 마냥 그렇게 묵묵히 일했다. 나이가 들고 눈치가 생겨서야 명절 설거지는 내가 도맡아 했다.


7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몇 년 전 엄마는 정년퇴직을 했다. 하지만 제사와 차례는 여전히 지냈다.


3살 어린 남동생이 대를 이을 장손이었지만, 우리 집안이 대를 이어갈 만큼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는 것은 머리가 크고서야 알았다. 동생은 아빠가 장가갔던 나이와 같은 27살에 결혼하여 부산으로 처가살이를 하러 내려갔다.


엄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했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현명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냉정한 시어머니 밑에서 군말 없이 행해야 했던 모든 시집살이가 얼마나 진절머리 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또한, 직장 생활을 하며 사회 돌아가는 것을 잘 알았던 엄만 요즘 사람들이 시집살이를 하지도 않을 것을 잘 알았고, 그 사람들이 정상이라 생각했다.


“엄만 무지해서 당했지만 요즘 애들이 똑똑한 거지.”


그래서 엄만 명절 때도 동생에게 오라는 소리도 잘 안 한다. 부산에 살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손주들 보러 내려가는 것 말고는 왕래가 없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나는 뉴스에서 추석과 관련한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내용을 접했다. 엄마에게 추석 때 차례 지내지 말고 미국으로 도피했다 가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지만… 평생을 한스럽게 받쳐왔으면서도 엄마는 쉽사리 내쳐버리지 못했다.


엄마같이 살지 않겠다고 냉정하게 한국을 떠버린 나와 다르게 엄마는 냉정하지 못했다. 회사 일정 때문에 추석 일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와 버린 나는 한국에서 명절을 보낸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내가 있었다면 도와주기라도 했을 텐데…





추석이 지나고 엄마에게 전활 걸었다. 엄마는 뭔가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고모, 아빠를 상대로 극적인 타협을 본 결과, 앞으로 3년만 더 제사를 지내고 그 이후로는 절에 맡기겠다고 합의를 봤다는 것이다.


70대가 되어가는 엄마가 3년이나 더 제사와 차례를 지낸다고 하니 나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엄마는 이제야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다는 듯한 홀가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거진 40년의 세월. 엄마가 대단해 보였다. 가족이니 누굴 원망하고 말고 할 것 없지만… 엄마의 희생으로 이 모든 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그르렁했다.


애써 눈물을 참고 말했다.

“엄만 진짜 대단해. 난 엄마 같이 못 살아. “


엄만 말했다.

“넌 엄마 같이 살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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