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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영 Oct 31. 2016

Underground Boy

다방집 소년 5(상)

다방집 소년 5(상) (*5화도 상하 편으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잠에서 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폭발할 듯 한 굉음이 들렸다. 가까스로 감겼던 눈을 떠 보니 내가 컨버터블형 오픈카를 타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양쪽으로 메고 있었는데 착 감기는 시트의 감촉이 놀라웠다. 빨간 카시트 색깔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그런데 옆에 있는 사이드 미러를 보게 됐는데 아무리 봐도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차 밖을 보니 까마득히 높은 하늘이었다. 그러니까 이 오픈카, 아니 이 뚜껑도 없는 차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양쪽 손으로 안전벨트를 꽉 부여잡았다.

 이 무슨!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보니 아까 정신을 잃기 직전에 봤던 그 소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살짝살짝 머리가 날리는 그 소녀의 프로필은 건강함을 넘어서 너무 아름답게 보여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마치 얼굴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꽉 붙는 청바지에 가죽 장화에 타이트한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은 소녀는 정말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왼손만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데도 말이다. 나는 무서워 곧 죽을 것 같았지만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소녀의 육감적인 가슴으로 눈길이 갔다.

 내가 아무리 17살이라 거시기가 늘 꼴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욕은 딱히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내 눈은 왜 이리 음흉한 걸까? 왜 시선은 자연스럽게 저쪽으로 향해 가야만 하는 걸까…? 그러다 그 소녀가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의 눈과 딱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 소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아까 내가 봤던 시선의 방향을 알아차리더니 “어라! 이 소년 안 되겠네? 지금 어디를 보는 거야! 어휴! 응큼해!”라며 다시 내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뭐 어쩔 도리 없이 그냥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에잇!



 다시 눈을 떠보니 어떤 방이었다. 분명 다방집 홀은 아니었다. 비상구 등도 안보였고 일단 전체적으로 환했다. 나는 그야말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말 그럴듯한 방이 내 눈앞에 떡 하니 펼쳐졌다. 우선 천장은 높디높았고 창문도 내 생전에는 보지 못한 위로 길쭉한 창문이었다. 토요일 밤 10시면 ‘빠~빰 빰 빠밤!’으로 오프닝 타이틀로 시작하는 MBC의 주말의 명화에서 하던 외국 영화 속에서 보던 것들이었다. 또는 KBS 제 2 방송에서 무슨 특집으로 BBC에서 방송했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친절하게 더빙까지 해 틀어주어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났다.

 그 방송을 볼 때는 엄마와 내가 처음 이 동네로 이사를 와 지하 술집을 하던 시절이었다. 안방 내실에서 도박을 하던 아저씨들 옆에서 쪼그려 자면서도 TV를 봤다. 노름에 빠진 아저씨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 자욱한 방이었다. 형광등은 맛이 가기 직전이라 무척이나 침침했다.


 “허허! 나가리, 나가리! 한판 더! 이번에는 따블인니더!”


 뭐 이런 소리가 났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나무다리가 네 개나 달린 TV로 햄릿을 연기하던 배우가 펼치던 명연기에 흠뻑 빠졌었다. 이 방은 바로 그 햄릿이 살던 곳과 비슷했다.

 여하튼 창문 하나 없는 지하 다방집에 비해 정말이지 시원시원하게 자리를 잡은 높은 창문들 앞으로 고급스럽게 붉은 장미색 커튼이 쳐 있었는데 커튼에 새겨진 문양들이 꽤 독특했다. 방패에 H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둘레에는 무수한 잎사귀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무슨 귀족의 문장 같은 게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우리 다방집 홀 보다는 작았지만, 상당히 널찍한 방이었다. 더군다나 지하 다방집 내실 옆 내 쪽방에서 풍기는 습기를 가득 머금은 지하실 특유의 쿰쿰한 냄새 따위는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햇볕에 잘 말린 침구들에서 나는 특유의 상쾌한 내음이 가득했다.

 문득 내가 정신을 잃어서 어디 럭셔리한 병원에라도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기는 병실이라고 하기에는 뭐랄까? 너무 럭셔리했다. 우리 집 형편에 이런 곳에 올 가능성은 1%도 안됐다. 아니면 무슨 호텔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것도 확률은 낮다.

 그러다 아까 그 소녀는? 그러면서 주변을 더 둘러보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내가 살던 주변에서 극히 보기 힘든 방이었다. 그리고 좀 이상했다. 그렇다고 아주 많이는 아니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좀 편안하달까? 알 수는 없지만 뭔가 편안한 감정이 물결쳤다. 벽마다 유화로 된 상당히 큰 중세풍 풍경화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누운 침대는 푹신했고 안락했다. 베개는 말할 필요도 없고…. 다방집 홀에 있는 의자를 붙여 만든 침대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편안했다.  


 “아! 침대란 게 원래 이런 거구나!”


 침대에 누워서 온 몸으로 꿀렁꿀렁 침대를 흔들어 봤다. 부드럽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쿠션감이 좋았다. 오! 이 방 전체는 아이보리 색으로 칠해져 정결한 느낌을 주었다. 침대 앞에 우리 다방집 레자 의자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이 화려하게 수를 놓은 쿠션 의자가 몇 개 있었고 너무나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탁자도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었다.

 도자기 같은 걸 보관하는 장식장 같은 것도 있었는데 그 옆 벽난로 위에는 화려한 문양의 탁상형 시계가 오후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KBS 1 채널에서 하는 <당첨! 올림픽 복권> 봐야 하는 시간인데…. 사실 나는 매주 복권을 산다고 했다.

 물론 간첩을 잡으면야 그 보다는 낫겠지만 내가 무슨 수로 간첩을 잡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까 아침에 산 복권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니 옷이 내 옷이 아니었다. 주머니도 없는데 무슨 부들부들한 파자마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출입문은 양문으로 되어있었는데 역시나 높고 넓었다. 그 위쪽으로는 아치형으로 창까지 있었다. 벽마다 전등이 달려있었다. 내 평생 죽기 전에 이런 방에서 딱 하루만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보리 색으로 된 양문을 열고 누군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하녀 복장을 입은 여성인데 어라!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는 고양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 같이 따라 들어온 남자 집사도 고양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은 사람인데! 헉! 내 눈이 미쳤나? 이들은 진정 고양이 인간들이란 말인가? 키는 둘 다 나보다는 약간 커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도련님!”

 “아~~~ 악! 아아아악! 이게 뭐야!”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고양이 인간이 말을 했다. 나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그들을 뿌리치고 양문을 통과해 방 밖으로 나갔다. “도련님!” “도련님” 이라며 그 고양인 인간들이 나를 불렀지만 뒤돌아볼 틈도 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카펫이 깔렸고 양옆으로 화려한 문양의 부조들이 붙어 있었다.

 무슨 호화로운 왕궁 같은 복도를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유리 천정이 있는 큰 아뜰리에 같은 곳을 통과하게 됐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었다. 여기서  다시 밖을 찾아 나가야 하는데 약간 공황이 왔다. 나는 어디인가? 도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더니 겨우 현관을 찾을 수 있었다.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잘 꾸며진 서양식 정원이 있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는데, 정말이지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버드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정원 가운데로 큰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저 멀리 큰 대문 같은 게 보였다.

 나는 무조건 건물 맞은편 그 대문으로 뛰어갔다. 문 위로는 각가지 조각들이 있었는데 눈에 뵈지 않았다. 갖가지 특이한 동물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곧이어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제복을 입은 고양이 남성들이 나를 행해 달려왔다.

 이게 뭔 상황이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일단 밖으로 탈출을 해야 했다.

 “거기 서세요!”

 “정지!”라는 말을 하며 뒤에서 달려오는 고양이 인간들을 물리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을 그들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부웅! 소리와 함께 저들이 공중으로 튕겨져 나갔다. 이건 또 뭐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뛰어야 했다. 가까스로 정문에 도달했는데 이미 나를 총으로 막고 서있는 제복을 입은 고양이 인간들도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 역시 붕! 하고 튕겨져 나갔다. 양 손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손을 후후 불며 식혔다.

 정말이지 무거운 문을 억지로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굉장한 장면이 펼쳐졌다. 엄청 큰 사각형의 광장인데 네 방향으로 다양한 양식의 유럽식 건물들로 빼곡하게 둘러 쌓여있었다.

 그런 데다가 엄청난 소음과 함께 여기저기 야옹거리는 고양이 인간들의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만국기 같은 게 여기저기 걸려 있었고 알록달록한 회전목마 같은 것도 보였다. 그리고 풍선으로 만든 거대한 고양이 인간이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축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고양이 인간들은 다양한 복장과 분장을 하고는 무슨 일인지 모두 아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누군가 나를 쫓아 문을 열고 따라 나왔다.  

 나는 정문 계단을 내려서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없는 고양이 인간 사이로 휩쓸려 들어갔다. 하필 좀비 차림을 하고 걷는 고양이 인간과 입에 피를 흘리는 뱀파이어 분장을 한 고양이 인간과 나란히 걸어갔다. 무서웠다. 나는 몹시 겁이 많다. 뭐, 인파의 흐름에 따라 어쩔 도리 없이 흘러가게 되었다. 여기저기 이해할 수 없는 요란한 음악들도 들려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많은 인파 사이로 걸으면서 ‘이건 도대체 뭐, 뭐지?’ ‘제발 날 집에 데려다줘! 용꿈 꾸고 산 복권은 아니더라도 지난주에 산 복권은 맞춰 봐야 된다고!’ 뭐 이런 잡다한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굉음소리가 광장의 하늘에서 나기 시작했다. 무슨 쑈를 하나? 그때였다 광장 하늘에서 수직으로 모터사이클이 내려오더니 내 머리 위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말이 돼? 이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나는 어쩔 수 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하늘을 나는 모터사이클의 굉음 때문인지 고양이 인간들은 바닥에 앉은 나를 두고 사방으로 물러났다. 나는 도망을 가려고 했지만 무슨 일인지 도망을 갈 수가 없었다.  부아앙! 거리는 모터사이클의 굉음 때문에 귀를 막았다. 역시나 그 소녀였다. 바닥에 앉은 채 엉덩이를 뒤로 밀며 손을 내밀어 아까 제복을 입은 고양이 인간들에게 하듯 소녀에게 손바닥 공격을 해 봤지만 허사였다. 도대체 이 소녀는 뭐냔 말이다. 할 수없이 애원을 했다.


 “나 집으로 데려가 줘! 제발! 제발! 쫌!”


 그 아름다운 소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소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자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젠장!’


                                                                           …


 다시 눈을 떴을 때 도서관 창문은 황혼에 물들고 있었다.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지만 여전히 도서관 서가였다. ‘이런 꿈이었잖아!’ 그러면서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꼬르륵!’ 배가 심하게 고파왔다. 그리고 하악! 아까 읽다가 정신을 잃었던 희랍인 조르바와 그 조르바에게 대장이라 불리는 주인공의 칼 같은 이별 부분을 다루던 페이지에 침을 가득 묻어 있었다. 내 입 주변에도 침이 흥건했다. 17살이나 먹었는데 이게 뭐냐?

 아이! 그리고 내가 원래 책을 얼마나 아끼는데! 그래도 남들 볼까 봐 시치미를 떼고 소매로 쓱쓱 닦고 입을 뭍은 침을 손으로 닦는데 오른 손목에 무슨 시계 같은 게 보였다. 어라! 분명히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나는 원래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 차더라도 왼손에 찬다. 간혹 술집 시절 아저씨들이 술값 대신 외상으로 맡긴 시계도 차 봤지만 어느 것도 오래가지 않고 빨리 고장이 나서 그냥 버렸다.

 온통 검은색으로 된 전자시계였다. 경일이가 방수가 되는 카시오 전자 손목시계를 차고 다녀서 꽤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이 시계는 상표 같은 게 전혀 없이 버튼만 네 군데 모서리에 있었다. 둥그런 테두리 안에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판과 색깔이 각기 다른 빨갛고 파란 두 개의 둥근 원이 깜박이고 있었다. 숫자로 17:55:45가 보였고 초를 나타내는 숫자는 계속 바뀌었다.

 시간은 얼추 맞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뭔가 고급스러운 데 하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이게 어디서 생긴 건 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가가 문을 닫을 시간이었는지 사서 아저씨가 자신의 금딱지 시계를 손으로 두드리며 내게 눈치를 주었다.  

 서둘러 읽었던 페이지 모퉁이를 접어서 서가 반납대에 놓고 나왔다. 엄마에게 공부를 한다고 와 놓고서는 공부 한 자 안 한 채 열람실에 놓았던 가방 그대로 들고 도서관 현관 앞으로 나왔다. 엄마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름다운 석양이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들은 여전히 바람에 유유히 흔들리고 있었다.


 다방집 근처로 오자 상가 건물 1층 다방집 입구에 걸린 우리 다방 간판에 들어온 불이 보였다. 반가웠다. 주말에 간판 불은 내가 주로 켰는데 오늘은 이미 켜져 있었다. 수도 다방 글자 밑에 Capital Coffee Shop이라는 영어로도 적혀있었다. 그래도 엄마는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꽤 고학력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다방 집에 돌아와서 “엄마! 밥!”이라고 할 찰나에 TV에서 김포공항에서 폭탄테러가 있었다는 긴급 뉴스를 하고 있었다. 다방의 분위기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몇 명의 손님들 사이로 특히 미스 나 누나가 유심히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서먹한 사이라도 여기서 무슨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 누나! 무슨 일이에요?”

 “아! 김포공항에 폭탄테러가 났다네!”

 “그러니까 왜요?”

 “왜 긴? 아웅산 테러 때처럼 저 놈들이 이번에도 아시안 게임이 배가 아파가 시한폭탄을 터트맀겠지. 뭐!”

 “사람도 다쳤어요?”

 “응, 그래! 미국 가는 가족 배웅 나온 가족이 마이 당했다 카더라고! 지금 속보라 나도 아직 마이 몰라!”

 “네! 아! 씨! 북한 놈들! 정말 나빠요. 왜 죄 없는 사람들을!”

 “그러게 말이야! 참말로!”


 화가 났다. 왜 이런 일로 평범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하냐 말이다. 일단 내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아! 배고파!”하며 배를 문지르는고 있는데 엄마가 내실 문을 열었다.

 “아들! 왔네? 저녁 먹자!”

 “엄마!” 왠지 엄마가 반가워서 다정하게 엄마를 불렀다.

 “왜? 아들! 왤케 다정하게 엄마를 부른데…! 용돈 필요해!”

 “아니, 말 좀 들어 봐! 엄마! 나 말야, 낮에 깜빡 졸다가 이상한 꿈을 꾼 거 같아!”

 “뭐?”

 “고양이 인간들이 많은 사는 나라에 갔던 거 같아!”

 “뭐라구!!!” 생각보다 엄마 목소리가 컸다. 그리고 엄마 표정이 뭔가 이상하게 어그러졌다. 그러더니 금고 쪽을 잠깐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왜? 엄마! 저기 뭐 있어!”

 “아냐! 아들! 어서 와 밥 먹자! 너 좋아하는 돼지국밥 좀 사 왔어!”

 “와! 맛있겠다. 오늘 점심도 굻었더니 나 진짜 배고팠거든!”

 “……그래! 이리 와서 먹어!”  


 엄마는 점심도 굶었다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내 시선도 외면한 채 미스 나 누나도 부르더니 식탁을 같이 차렸다. 저녁밥을 먹는 내내 엄마는 별 말이 없었다. 28인치 다방집 TV에서는 계속 북괴에 의한 김포공항 폭탄 테러 뉴스 특보가 흘러나왔다.

 미스 나 누나도 별 말이 없었다. 평소 생긋생긋 잘 웃던 누난데 일요일 저녁 분위기가 묘했다. 그런데 엄마는 밥맛이 없다고 나 보고 더 많이 먹으라고 고기를 내게 더 덜어주었다. 그렇게 고기를 좋아하는 엄마가 웬일이지! 특히 생간이나 천엽 같은 것도 좋아했다.

 돼지 국밥에 그런 게 많이 들어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마돈나를 닮은 미스 나 누나보다 아까 봤던 그 미스터리 한 소녀가 생각이 났다. 나를 몇 번이고 기절을 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진 그 애는 그저 꿈에서만 본 것뿐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생생한데!

 밥을 먹고 내실 옆 내 쪽방에 들어와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오늘 꾼 매우 묘한 꿈을 생각하고 고개를 내려 갑자기 생긴 손목시계를 보는데 순간 핑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져 왔다. 요즘 가끔씩 어지러움증이 몰려오곤 했다.

 심하게 어지러울 때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엄마에게 티를 내지 않고 학교를 갔다. 학교에서 아침 내내 자는 이유 중에는 이런 어지러움증을 이겨내려는 의도도 있다. 내가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한동안 숨을 고르니 어지러움증이 좀 가셨다. 그건 그렇고 <희랍인 조르바>를 읽었으므로 해서 거시기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몽정 따위를 하느니 억지로라도 수음을 해서 내 몸에 쌓여 있는 것들을 쏟아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시는 몽정 따위로 그런 황당한 일을 겪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까 낮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하늘을 나는 스포츠카를 모는 가슴이 매우 발달한 소녀를 생각하며 수음을 시도했다.

 창우 녀석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지만(?) 나 역시 수음 따위는 별로 생각이 없었다. 사실 야한 책을 보면서 그런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내 마음속에 이는 강렬한 살의에 비하면 17살의 성욕은 약하고 미미했다.

 더군다나 도저히 사는 게 여유가 없는데 17살의 거시기는 건강한 편인지 늘 곤두서 있을 때가 많았다. 정말이지 골치 아픈 녀석이다. 어쨌든 소위 내가 미리 내 몸에 쌓인 것들을 빼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아무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수음을 하고 있었다. 팔뚝이 아파오는 순간 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성재군!” 미스 나 누나 목소리다. 아이씨! 결정적인 순간인데……. 얼른 바지를 올렸다. 아이씨이~! 이건 뭐 몽정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진짜! 짜증이 몰려왔다.    


 “성재군! 성재군!” 심지어 미스 나 누나가 나를 급하게 찾아 내실 옆 내 쪽방까지 찾아들어왔다. 일촉즉발의 위기! ‘아!!!’  

 “으흠, 으흠, 네, 네! 누나! 어! 무슨?”


 의자에 앉아 가만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아무 감정 없는 수음이라 할지라도 어쩔 도리 없이 몸이 움찔대는 거였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눈도 안 마주치고 급하게 꺼낸 성문 종합 영어를 거꾸로 들고 보는 척하며 있는 순간 내실 옆 내 쪽방 문이 열렸다.   


 “성재군!”

 “왜, 왜요? 누나!”

 “성재군! 책 거꾸로 들었네!”

 “아! 네! 누나! 아하하하하!”


 정말 민망했다. 참담하고 민망했다. 책을 거꾸로 든 것을 들킨 것은 둘째치고 오늘도 팬티를 손으로 빨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제발 손을 좀 씻고 싶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없이 수음을 했는데 왜 이런 민망한 경우를 겪어야 하는지 참으로 억울했다. 여하튼 이 마돈나 닮은 누나랑은 뭔가 아주 많이 안 맞는구나 하는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바로 드는데,


 “성재군, 영어 잘하지?”

 “네? 아뇨! 왜요?”

 “다방에 미군이 왔다 아이가! 뭘 묻는데 난 잘 몰라가꼬! 뭐 묻는지 일단 대답 좀 해줘 봐봐! 성재군!”

 “네?”


 심장이 뛰었다. 내 아무리 다리가 네 개인 TV유모 덕분에 AFKN TV 시청 경력이 10년이 넘었다손 치더라도 직접 미국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짜 미스 나 누나를 따라 밖에 나가보니 술에 반쯤 취한 미군이 앉아 있었다. 백인이었는데 아주 나쁘게 생기진 않았다. 언제나 쾌활한 전형적인 미국 남부 젊은이처럼 보였다. 나는 과감히 “와첩 맨!(What’s up! Man!”)을 외쳤다.

 TV유모를 통해 내가 보고 들은 게 많았달까! 술에 취해 반쯤 감기던 미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더니 인사를 하며 자신을 존이라 했다. 그래서 나는 “암 성재!(I’m SungJae)라고 했다. 미군의 눈이 더 커지더니 나보고 영어 잘 한다고 했다. 영어 성적은 쥐뿔! 학교 성적은 개뿔!  

 아주 가끔 다방집엔 미군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택시로 한 20분 거리에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여기 미군들이 출입하는 클럽들이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택시 정류장 근처에 생겼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우리 다방에 미군들이 차츰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지금 다방집 마담이라고 해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그것도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을 내세우고 싶은 엄마의 의도가 깃든 다방 간판 때문일 것이다. 말했듯이 우리 다방집 간판 수도 다방이라는 글씨 아래에 빨간 글씨로 <Capital Coffee Shop>이라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 간판에 불이 들어오니 그 글자가 더 잘 보이나 보다.

 지금 이 미군은 아니지만 간혹 떡이 되도록 취한 미군은 위험하다. 여하튼 어쩌다 자꾸 취한 미군이 다방에 들어오는 일이 생기는 것은 어쨌든 사실이다. 그들이 오면 개중에 말이 안 통해 그냥 나가지만 간혹 짧게라도 영어가 되는 내가 불려 나갈 때가 있었다.

 대충 이 쾌활한 미국 남부 청년은 하필 이 먼 곳까지 와서는 이 동네에 굿 플레이스(Good Place)가 없냐 묻는다. 미군 클럽 이야기를 하니 쉣! 하며 욕을 한다. 더 묻기 뭐해서 길 건너 카바레를 추천한다. 외로운 눈빛이다. 거기 무희들의 쇼가 볼만할 거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거기 오는 사람들도 너처럼 영어 잘 하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한 번 가보라 한다. 그가 날 보고 다시 한번 영어를 아주 잘 한다며 투썸 업(Two thump up)을 한다. 거참 수학보다야 점수가 높다지만 저 존이라는 미군이 내 영어 성적을 알고 하는 말인지 뭔…!

 솔직히 내 영어성적이 낮다고 말하자 술이 취한 그는 아니라고 손을 흔든다. 그의 모습에 약간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하긴 내가 미군 TV를 많이 봤지. 암!  

 뭐, 여긴 싸고 구린 다방이니 일단 나가서 돌아다녀보라고 했다. 나이는 스물셋. 그나마 착하다. 자기는 2nd lieutenant(소위)라고 했다. 미스 나 누나를 두고 자기가 좋아하는 팝 싱어 마돈나를 닮았다고 했다. 어라! 이 자식, 사람 보는 눈이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군 장교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왔다고 했다. 거기가 어딘지? 뭘 알겠는가만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주립대학을 다니면서 ROTC를 했고 한국에 자원해서 왔다고 자랑을 했다.

 자신의 친구들은 한국에 가면 다들 죽으러 가는 줄 안다고 했다. 와보니 한국은 참 살만한 곳이라며 웃었다. 내가 이런 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게 신기했다. 서울 근처에 있다가 이 곳은 지난주에 처음 온 곳이라 주말에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외로운 모양이라 생각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니 더는 지청구를 놓지 않고 다방집을 나간다. 휴! 하는데 뒤를 돌아보며 아까 봤던 미스 나 누나가 정말 섹시하다고 했다. 갈수록 나랑 취향이 비슷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 미군하고 친해져야 하나? 뭐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러나 난 기본적으로 저런 육중한 체격의 GI 솔저들이 두렵다.

 최근 들어 동네에서 술 취한 미군이 멀쩡한 사람을 치고 이러저러 깽판도 친다는 소리를 여전히 듣고 있었다. 우리나라 경찰들도 미군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들었다. 영어가 되어야 미군 헌병이라도 부르지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

 제발 내가 저런 미군들의 마음속까지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 미군이 나가자 조용히 내실에 피해 있던 미스 나 누나가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나왔다. 다시 한번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미군 소위가 나 두고 간 담배와 라이터가 탁자 위에 보였다. 담배는 말보로 레드였다. 말로만 듣던! 그 담배를 들고 미군을 따라 밖으로 나갔지만 어느새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겨우 한두 개피나 피웠을까? 온전히 남은 담배 한 갑과 지포 라이터가 남았다.

 결국 이 날은 내가 처음 담배를 배운 날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니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수음도 그렇고 성적이나 뭐나 매우 어정쩡한 내 신세도 그렇고 아까 봤던 육감적인 소녀도 그렇고 생각이 아주 복잡했다. 지난 금요일 밤에 나에게 담배를 권하던 서울 말씨의 사내가 빗속에서 멋지게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후 내뱄던 장면이 떠올랐다.

 깊은 밤이 되고 나서, 비상구를 나가 건물 뒤 마당에서 시외버스 터미널의 주차장을 바라보며 섰다. 좀 전에 아무 감정 없이 팬티를 빨았다. 그러나 참담한 마음을 위로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시동을 건 채 서 있는 시외버스들이 많아서 평소에는 버스 매연으로 매콤할 때도 있었지만 늦은 밤이라 터미널의 주차장은 조용했다. 말보로 레드 담배를 하나 천천히 꺼내 입에 물었다. 살짝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여름 방학 동안 다방집 건물에 새로 생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본 영화들이 꽤 있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들이 꼭 말보로 레드 담배를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 지포 라이터 뚜껑을 철컥 열고 멋있게 불을 켰다. 이제 이 라이터로 멋있게 담뱃불을 붙였다. 딱 거기까지 멋있었다.

 기어이 말보로 레드를 한 모금 빨아보니……. 어어이쿠나!!! 핑그르르 또 한 방에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정신줄을 놓아야 한단 말인가? 담배연기가 입안에 들어오자마자 무릎의 힘이 탁 풀려 휘청하더니 벽에 얼굴을 그대로 부딪쳤다. 그리고 목구녕이 타들어 갔다고 할까… 기침은 뭐… 커억컥!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한 나머지 저녁으로 먹었던 음식을 조금 게워냈다.  


 아! 뭐 여하튼 참 요상한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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