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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영 Jan 01. 2017

Underground Boy

다방집 소년 (연재소설 #10 + 에필로그)

다방집 소년 10 +에필로그

 (- 그동안  <Underground Boy - 다방집 소년>의 연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야기의 마무리를 하다보니 무척 길어요. 시간 나실 때 찬찬히 읽어봐 주세요. 더불어 정유년 새해 늘 건강하시고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Happy New year!!)


 시립 도서관 옆에 서 있는 큰 버드나무가 항구 도시인 D시 특유의 겨울 칼바람에 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우를 만나고 나서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막상 결혼식 하루 전이라서 그런지 자꾸 묘한 일들이 생겼다. 더군다나 나는 친구도 별로 없는 데 믿었던 친구의 속마음을 알고 보니 미친 듯 흔들리는 저 버드나무 가지 마냥 마음이 흔들렸다.

 한참 버드나무를 바라보다가 문득 발길을 돌렸다. 뭔가 아쉬운 마음에 자꾸 도서관 쪽으로 돌아보게 되었지만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옛 친구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는 이상 나도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 중학교 시절 태진이가 생각이 났다. 태진이는 경일이를 그렇게 괴롭히던 중학교 시절 짱이었다. 이미 태진이의 마음에 들어가 다시는 경일이를 괴롭히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었다. 이제 태진이의 마음을 움직여 종철이 패거리를 다스리면 좋겠다 싶었다. 내가 자꾸 종철이 패거리에 맞으면 그것도 버릇이 된다.

 마음이 놓이는 것은 태진이가 여전히 싸움 하나만큼은 이 근방 고등학교 아이들 중에서는 최고라는 소문을 들었다. 당장 월요일 저녁에 태진이가 종철이 패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수를 써도 복잡한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아 하릴없이 D시의 신도시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 시간을 보기도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몇 시간에 한 번씩은 서울고속버스터미날로 가는 고속버스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가 태어난 서울로 갈 수도 있었다. 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내가 시설에 처음 갔을 때 엄마에게 능글맞은 원장의 입에서 나왔던 명문대 교수의 부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나는 그 명문대 교수가 누군지 궁금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날이 점점 더 추워졌다. 서글픈 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와 다방집 근처 동네 시장을 걸었다.


 “여보!!! 내가 미쳐 뿌리겠네! 이 냥반아! 당신 돌았어요? 거길 왜 가! 당신이! 하라 카는 일이라 하란 말이야! 내사 미치뿌겠다. 아이고 내사마! 와 사노! 이 냥반아! 아이고야! 아들 볼 나치 없구마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뿔라 카네! 나가 디지뿌라! 이 미치갱이야!”   


 큰 소리가 나 쳐다보니 주사가 너무 심해 하마터면 내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릴 뻔한 주씨 아저씨의 이불집이었다. 하필 그렇게나 포근해 보이는 이불들 너머로 주씨 아저씨가 본인보다 덩치가 크고 건장한 아내에게 심하게 혼이 나고 있었다.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하셨길래 저리도 혼이 나는지 궁금했다. 아마 술 때문일 것이다. 괜히 안 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주사는 제발 그만 좀 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릇가게에서부터 반찬가게, 떡집, 기름집, 쌀가게, 족발집에 이르기까지 동네 시장을 다 돌았는데도 이상하게 오늘은 지하 다방집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하루 종일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막연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나를 감싸 안았다. 결국 어스름한 저녁이 되었고 허기가 졌다.  

 어쩔 도리 없이 다방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훈훈한 김이 훅 몰아쳤고 TV에서는 평화의 댐 모금 방송을 하고 있었다. 하긴 북한이 금강산댐을 부러 무너뜨리는 수공을 해오면 내가 태어난 수도 서울의 국회의사당이 물에  잠긴다는데 아주 잠깐이나마 아끼고 아끼면서 모았던 용돈을 털어 성금을 내야 하나 고민했다. 어쩌면 내가 보내버린 대통령이 식물인간이 된 셈이니 일말의 책임감도 느껴졌다.

 TV의 성금 모집은 차치하더라도 연말이라 그런지 12월의 첫 토요일의 다방집은 묘했다. 뭐랄까? 평소 토요일의 분위기보다도 더 달뜬 분위기였다. D시에서 다방 커피 맛이 제일 낫다는 평을 듣는 수도 다방의 분위기만큼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언제나 다방집의 가장 마지막을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다방집의 마지막을 쓸고 닦으며 나는 이 다방집에 흘리고 간 사람들의 마음도 쓸어 담았다.

 슬프고 외로운 마음부터 허영심에 들떠 자신을 파괴하는 마음, 마돈나를 닮아 섹시한 미스 나 누나를 어떻게 해보려는 음침한 마음, 다른 사람을 속여서 어떻게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까지 여기저기 마음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버려져 있었다. 나는 다방집 일상의 마지막을 청소하듯 그런 마음들도 정리했다.

 언젠가 늦은 시간에 다방집 청소를 하고 있었다. 거의 12시가 다 돼 가는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안경잡이 아저씨가 나를 보고 이리로 좀 앉아 보라고 했다. 뭔가 선량해 보이면서 서울말 비슷하게 썼고 안경을 써서 그런지 지성적인 분위기도 조금 가진 남자였다. 카운터 앞 어항 옆 자리에 앉았는데 대뜸 E = MC2(제곱)이 무언지 물었다. 나는 아직 잘 모른다고 하자 고등학생이 그것도 모르냐고 타박을 하며 한바탕 물리학에 대한 강연을 했다.

  에너지는 물질의 질량에 광속의 제곱을 곱한다나 뭐래나? 원체 수학에는 젬병이라 바닥을 닦던 마대 자루를 든 채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의 강의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줄수록 우주며 아인슈타인이며 나도 대충은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지루해서 하품이 났다. 그러자 이 남자가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시더니 안경 너머로 나를 빠꼼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왜요?” 나는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어 이유를 물었다.  

 “왜요는 무슨! 왜요오!! 내 말 잘 들어 봐! 학생! 거기는 사기를 치면 차~암 잘 칠 얼굴이야. 아무리 봐도! 당신 얼굴이 말이야!”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당신 얼굴이 참 깨끗하고 참해서 진짜로 사기 치기 좋게 생겼다고!”

 “아! 네!”

 나는 그 순간 그가 사기꾼인 것을 직감했다. 만약 내가 아니라 엄마나 미스 나 누나가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분명히 사기를 당했을 것이다.

 “학생! 강의를 들었으면 강의료 내야지? 안 그래! 생각을 한 번 해 봐!!”

 “네?”

 “공짜로 이런 좋은 강의를 듣는 게 말이 되겠어. 학생! 만약에 내 강의를 듣고 학생의 진로가 바뀌었다고 생각을 해 봐! 그리고 정말 대단한 거야! 어메이징! 어메이징 알지? amazing! 또 말야! 학교에서 공부하면 등록금 내지? 과외를 받으면 과외비를 내지? 학원에 가면 학원비 내지? 그러니까 이런 학생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명강의를 들었으면 정말로 강의료를 내는 게 맞겠지? 안 그래?”


 그는 제 버릇 남 못주고 결국 내게도 사기를 치려고 했다. 하마터면 얼마면 되냐고 물을 뻔했다. 결국 그는 내가 호락호락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래 봬도 산전수전 공중전, 심리전에 현직 대통령까지 저 세상 언저리까지 보내버린 전력의 다방집 도련님인 것이다. 그는 나를 매우 낮고 만만히 여겼다. 이런 손님은 단순한 주취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주 단호해야 한다.    


 “이제 그만 가시죠! 손님! 장사 끝내야 할 시간이 지났어요.”

 “어! 와~~! 너 말을 왜 그 따위로 하니? 어른한테!”

 “가시라고요.”

 “와~~~! 이 놈 봐라? 나만큼 좋은 강의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디 나와 보라고 해! 응! 그 어려운 상대성 이론 강의를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해 줬으면 강의료를 내는 게 당연하잖아? 안 그래?”

 “아! 됐구요! 이제 가시라고요!!!”

 “하! 세상 참 말세다. 말세! 오 주여! 참말로 너 말 한 번 예쁘게 하네! 알았다. 야! 너 쳐다보는 꼴이 사람 죽이겠다! 아이고야! 말세야! 말세! 너 같은 사기꾼 새끼들 때문에 우리 인류의 종말이 가까운 거야!”


 내 눈초리가 매우니 서울 말씨인 데다가 안경까지 써 지성적으로까지 보이는 남자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냥 카운터를 지나더니 다방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아저씨! 찻값 주셔야죠.”

 “내가 미쳤니! 아가씨도 없는 다방에 와서! 너한테 그렇게 어려운 물리학 강의를 아주 쉽게 설명을 해 줬는데? 그걸로 퉁 치면 되겠네! 그만 하자! 아이 정말 무식한 새끼 같으니라고! 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기를 치는 그를 노려봤다. 말이 끝나자 그가 문을 닫고 쌩 나갔다. 계단을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나는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멀쩡히 생긴 얼굴이며 누구도 그가 사기꾼이라 생각하지 못할 지성적이고 선량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상 사기꾼이었다. 바로 이런 얼굴을 기억해야 한다. 선한 얼굴을 하고는 거짓말만 일삼는 자들을!

 나는 그때 그를 그냥 보냈다. 하지만 마대자루를 놓고 조용히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 선량한 얼굴을 한 그를 따라가 다방집 현관 앞에 섰다. 나는 큰길 건너 카바레 앞에서 D시를 떠나는 택시를 타려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틈만 나면 E=MC2을 앵무새처럼 읊는 어리석은 자였다.

 택시에 타는 그를 보면서 눈을 감고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그의 마음은 온통 E=MC2이 적혀있는 대학용 노트로 만든 단층집이 있었다. 그 집은 조그만 건드려도 심하게 흔들렸다. 사람이 살 곳은 못되었다.

 주머니에서 묵직한 정통 지포 라이터로 꺼내 철컹하며 뚜껑을 열고 라이터 돌을 능숙하게 굴려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종이 집에 불을 붙였다. 온통 E=MC2이 쓰여 있는 단층의 종이 양옥집은 금세 불이 붙었고 곧 활활 타올랐다. 내가 눈을 뜨자 저 멀리서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방집 셔터를 내리고 나서 성조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서울말로 조용히 읊조렸다.


  “이 씨발놈아!”


 아차! 혹시 몰라 뒤를 봤지만 다행히 엄마는 없었다.  


                                                                            …


 기어이 나는 다방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리 12월의 첫째 토요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다방집 홀의 분위기가 유달리 더 붕 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 연말연시나 긴 연휴를 앞두고 이런 분위기가 나는데 오늘은 좀 특이한 분위기였고 약간 생경한 느낌도 들었다.

 역시나 엄마는 오늘도 외출을 해 늘 앉아있어야 할 카운터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다방집은 주인이 있고 없고 가 미세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도 우리의 호프이자 마돈나를 닮아 미군 장교 조 스튜어트 소위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는 미스 나 누나는 다방집 새방에서 어젯밤부터 다방집 새방을 차지하고 노름판을 크게 벌이고 있는 노름꾼들과 토요일을 맞아 성업 중인 D 카바레의 아베크족 손님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노름판은 판마다 하우스 비를 따로 모았다. 미스 나 누나의 애인을 자처하는 친절한 필수 씨가 그런 것은 참 잘 챙겨주었다. 그러면 다방집에서는 커피나 음료수를 수시로 제공했고 담배는 내가 사다 주었으며 맥주나 안주는 또 따로 계산했다. 다방집 하우스는 그럭저럭 수지가 맞는 장사였다.   

 그러고 보니, 미스 나 누나가 우리 다방집에 온 지 거의 석 달이 흘렀다. 다방집을 개업하고 내가 봐왔던 어떤 레지 누나보다 솜씨 있게 장사를 했다. 간혹 내 몸, 특히 거시기 부위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신경이 쓰였고 유난히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간혹 나의 몽정에 등장해 난처했다.  

 그러나, 다른 걸 떠나서 열심히 일을 해주는 미스 나 누나가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일을 잘하는 누나가 언제까지 우리 다방집에서 일을 할까 걱정도 됐고 또 한편으로는 미스 나 누나가 다방집에서 만들어가는 이 묘한 분위기가 낯설었다. 다방집은 미스 나 누나의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뭐 어쨌든, 미스 나 누나 덕분인지 다방집 하우스 덕분인지, 나는 이번 4분기 등록금을 제때 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정작 다방집 마담인 엄마는 누나를 철석같이 믿어선지 점차 다방집에 머무는 시간이 줄었고 저녁마다 외출이 잦아다.

 나는 이동철 선생님이 왜 다방집 주인인 우리 엄마를 만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만큼이나 샤디아 공주가 나와의 결혼식에 매달리는 이유 역시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계가 아닌 이계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한 나라의 공주인 그녀가 어디가 모자라서 고작 다방집 도련님일 뿐인 나에게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또 그녀가 내게 보였던 뜻밖의 행동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게 살의를 일으키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마음속 결투를 하는 게 오히려 더 간단했다.

 물론 17살인 나로서는 그날 샤디아 공주가 보인 행동으로 인간적 본능을 충족했기 때문에 당연히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살의를 충족하는 것보다는 못했지만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무성애자를 자처하는 주인이 그나마 자위만 시켜주던 나의 거시기는 그날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샤디아 공주는 과연 좋아서 혹은 원해서 한 행동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머리가 아파왔다.

 말했듯이 엄마보다 상당히 나이가 어린 이동철 선생과 엄마가 사귀는 것만큼이나 샤디아 공주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미스터리 했다. 나는 과연 샤디아 공주와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인간계에 있었던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가 한 약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내가 결혼까지 해야 한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샤디아 공주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우리 학교 전교 1, 2등을 다투는 민소정도 좋은 사람이지만 솔직히 나는 샤디아 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 근방에서 엄마보다 더 예쁜 사람은 샤디아 공주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샤디아 공주와 엄마는 서로 닮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샤론 여왕과 엄마도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피곤한 날이다. 미스 나 누나에게 학교에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 조용히 다방집 내실 옆 어둡고 음습한 내 쪽방으로 박쥐처럼 스며들어갔다. 정말이지 마음이 복잡해서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유난히 다방집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은 토요일인지라 틈만 나면 담배 심부름을 가야 했다. 평소 나는 88이나 솔같이 많이 팔리는 담배는 보루 채로 사 왔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그래도 라일락이나 장미나 청솔 같은 특정 담배의 심부름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간혹 담배 심부름 와중에 내가 피우는 장미를 슬쩍 같이 사기도 했다. 물론 존 스튜어트 소위의 지포 라이터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직도 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황동색을 띠었으며 묵직한 바디감을 지닌 지포 라이터에서 뚜껑을 열 때 들리는 그 특유의 철컥하는 소리와 라이터 돌을 돌려서 심지에 불이 붙는 소리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몽정을 피하기 위해 어쩔 도리 없이 하는 자위는 차치하더라도 가끔씩 불같이 솟아오르는 살의를 겨우 겨우 참고 사는 17살에게 그 소리들은 지금 현재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저녁으로 전기밥솥에 남은 밥과 냉장고에서 꺼낸 몇 가지 밑반찬으로 끼니를 때웠다. 17살은 먹성이 좋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저녁을 먹고도 남아있는 허기를 율무차 한 잔을 만들어 먹으면서 달랬다.

 쌍화차랑은 비교가 되지 않지만 율무차는 맛도 있었고 먹고 나면 확실히 포만감도 생겼다. 율무가 정력을 떨어뜨린다는 말이 돈 후 손님들이 찾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나는 율무차가 맛있었다. 오히려 17살이라 항상 성이 나 있는 거시기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종종 찾아 먹어야 했다.

 그리고 가끔은 커피에 우유를 타 먹는 카페오레도 만들어 먹었다. 프림을 많이 넣은 다방집 커피보다 훨씬 목 넘김이 부드러워 좋았다. 영국산 홍차는 항상 맛이 써서 영국 사람들은 이걸 왜 마시나 싶기도 했다. 티백으로 나가는 우리나라 설록차 역시 돈 주고 사서 먹기는 아까운 데 굳이 이걸 왜 마시나 싶었지만 의외로 겨울이 되면 찾는 손님이 많았다. 나는 엄연한 다방집 도련님으로서 다방집의 모든 메뉴들을 만들 줄 안다는 한 가지 자부심은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잣을 얹은 따끈한 유자차가 어울렸다. 나는 이맘때 처음 오는 다방집 손님에게는 오히려 유자차를 권하기도 했다. 미스 나 누나가 바쁘면 나는 마담의 아들이자 “성재군!” 또는 “조군아!”로 불리면서 변태 같은 미술 선생과 막하 연애를 하시는 엄마(?)를 대신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미웁지 않았다. D시에 정착하기까지 엄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이형사가 결혼을 했다고 말하는 엄마의 서글픈 표정을 이미 나는 봤었다. 나는 엄마가 부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이 여러 가지 이유로 율무차를 마시며 다방집 홀에서 모처럼만에 청춘스타 이덕화가 진행하는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보려고 하는데, 상당히 큰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는 다방집 새방에서는 점차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 또 판돈을 올리고 있고 누군가는 큰돈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아시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노름판을 오랫동안 지켜본 바 있는 나로서는 은근히 노름꾼들의 큰 목소리에서 풍기는 수컷들 특유의 자존심 대결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허세와 사기의 냄새도 같이 맡게 되었다. 하긴 노름이란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오랜만에 존 스튜어트 소위가 사복을 입고 예의 미국 남부 청년 특유의 낙천적인 미소로 싱글거리며 다방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나랑 눈이 딱 마주쳤다. 존 소위는 언젠가부터 내 이름을 불렀다.


 “What’s up, Sung-Jae. long time no Seen!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

 “Me too! I’m fine. and…”

 “Have a good time. it’s saturday night! isn’t it!”

 “Oh! yeh! hahaha!! you too, Sung-Jae!”


 미국에서 주립 대학까지 나온 ROTC 출신 미군 장교인데 은근히 우리 다방집 커피도 잘 마신다. 물론 마돈나를 닮은 미스 나 누나에게 관심이 많아서겠지만…. 그러나 존 소위와 영어로 계속 얘기를 했다가는 머리가 굉장히 아파지는 관계로 그제 못 본 12월 4일 자 조선일보를 서둘러 챙겨 들고서 다방집 내실로 들어갔다. 토토즐을 못 보는 것은 아쉽지만 영어로 오래 말하는 것보다는 낫다.  

 언젠가 말했듯이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는 꼭 챙겨 읽었다. 아버지가 없는 나로서는 이규태 코너에서 무언가 아버지에게서나 들음직한 갖가지 식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내 아버지가 이런 박식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혼자 상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내 아버지가 교양 있는 지식인이 아니라 이계에서 온 고양이 인간이라니?

 캐산 집사의 고급스러운 설명을 듣고 있자면 충격의 연속이었다. 내 아버지가 벨루아 공국의 귀족이자 국가적 영웅이라니!

 어쨌든 그제 이규태 코너는 <국민학교 명칭고(考)>라는 제목으로 지금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으로 쓰이고 있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명칭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중략) 2차 대전이 일어난 지 넉 달 후인 1941년 4월에 전시(戰時) 교육체제의 일환으로 '국민학교령'을 공포하고 일본과 한국의 모든 심상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명한 것이다. 그 국민학교령의 제1조는 이렇게 돼 있다. "국민학교는 황국(皇國)의 도(道)에 준하여 초등 보통교육을 베풀어 국민의 기초적 연성(鍊成)을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천황 중심의 국체의식(國體意識)을 투철하게 한다는 국체명징(國體明徵)사상과 국가주의 사상을 드높이는 전시교재(戰時敎材)로 교육내용을 바꾸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전시요원화 하려는 것이 국민학교의 기본취지였다. - 1986.12.4.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중에서>



 나는 이 내용을 읽고 내가 다녔던, 혹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가 왜 그렇게 폭력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 경우 이미 6살에 엄마에 의해 맡겨졌던 시설의 원장에게 사정없이 뺨을 맞았던 기억도 있었지만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도 학교를 다니는 내내 여러 아이들이 이선생, 저 선생에게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사정없이 얻어터지는 걸 보았다. 중학교 때나 지금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

 1940년대 황국신민의 자세로 전시에 준하는 상황을 지금의 학교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아침에 지각을 하게 되면 교감이나 교장, 교련 선생님이나 학생부 주임 선생에게 뺨을 맞거나 엎드려뻗쳐서 매를 맞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몽둥이로 발바닥을 맞았고 초등학교 2학년 때는 구구단을 못 외어 선생에게 계속 머리를 쥐어 박히며 모욕을 당했다. 그때부터 수학은 내 유일한 울렁증의 대상이 되었다.       

 임예진과 여러 편의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찍었던 와일드한 청춘스타 이덕화는 이미 앞머리가 많이 벗겨지고 있었다. 저런 청춘스타도 머리가 벗겨지는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스타도 결국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툭하면 “부타~악해요!!”를 외치는 그가 진행하는 <토토즐>이 끝이 나자마자 미스 나 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방집 스피커로 MBC FM 라디오를 틀어주었다. 9시 뉴스는 KBS나 MBC나 어디든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을 다루며 수도 서울이 물에 잠길 수 있다는 협박조 뉴스로 도배를 했다.

 엄마는 9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다방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낮에 종철이 패거리에게 맞았던 이곳저곳들이 욱신거리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현재 내 얼굴은 또 어떤가? 손거울로 얼굴을 보니 코는 아까 보다 더 부어 있었고 턱밑은 땅바닥에 처박히면서 긁힌 상처가 나있었다. 이 얼굴로 과연 결혼식을 할 수 있을까? 거참!

 스스로를 한심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방집 홀 어딘가에서 큰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미스 나 누나가 헐레벌떡 내실 옆 쪽방에 있는 나를 찾았다. 미스 나 누나는 상당히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성재군! 성재군! 이리 한 번 와봐라! 아무래도 싸움이 날 거 같…….”


 다방집에서 17살은 이럴 때도 쓸모가 있다. 쪽방 앞에 선 미스 나 누나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예감이 좋지 않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방집 새방에서 육두문자와 함께 거세고 뒤틀리고 새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공교롭게 영국 2인조 남성 밴드 웸(Wham)이 부른 <라스트 크리스마스(Last Christmas)>가 다방집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크리스마스까지 한참 남았는데 벌써 이런 분위기의 곡들이 라디오에서 방송이 되었다. 다방집 홀에는 영국 청년들의 감미로운 목소리의 노래가 흐렀고 다방집 새방에서는 엄청나게 살벌한 말들이 넘실거렸다.


 “너거 이 새끼들 다 짜고 치는 거제? 엉! 너거 씹새끼들 다 고소해 뿔기다. 엉!” 우리 반 태현이의 아버지인 김선주가 매우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사기도박에 빠졌음을 호소했다.


 “김선주님, 누가 짜고 칬다고 그래 싸요. 고마 조용히 가든지! 돈을 더 갖고 오든지! 맘 때로 하이소!”


 음흉한 배씨의 목소리도 들렸다. 배씨가 이렇게 크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제비족인 백구두 미스터 민은 어떤 일인지 다방집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지만 여차 하면 바로 튈 기세였다. 제비족은 이런 상황에 매우 민감하다. 바람난 유부녀와 정사를 하다가 남편에게 걸릴라치면 죽을 각오로 도망을 치던 자였다.

 아까는 없었는데 다방집 28인치 삼성 TV 앞 명당자리에 트랜스젠더 엘라가 와있었다. 나를 보자 새방 쪽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출입구 앞 테이블에 앉은 존 소위가 뭐라고 소리를 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바로 다방집 새방으로 향했다.

 새방 문을 열었다. 좀 전까지 다방집 하얀색 테이블 하나에 해방촌 담요를 깔고 선수용 의자 여섯 개를 놓은 어엿한 다방집 하우스의 노름판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테이블이 뒤집혀 있었고 맥주병을 던졌는지 하얀 벽에 맥주 자국이 나있었고 덩달아 맥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미스 나 누나의 애인을 자처하는 동네 청년 필수 씨가 서로 멱살을 잡고 있는 김선주와 음흉한 배씨를 말리려고 했다.

  

 “이제 그만들 좀 하세요!!” 내가 다방집 노름꾼들에게 한 소리를 했다.

 “니 뭐꼬?”


 김선주가 나를 보고 눈총을 쏘아붙였다. 그는 내가 자신의 아들과 같은 반 친구라는 사실을 몰랐다. 때마침 배씨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김선주의 손을 풀며 그의 배를 심하게 찼다.


 “큭!” 하고 태현이 아빠가 새방 입구에 서있는 내 쪽으로 쓰러졌다.  

 “김선주님!! 이제 고마 쫌 하입시다! 아 보는 데 와카심니꺼? 예!”

 “하아! 요것 봐라! 그래! 와카 긴? 니 새끼들이 사람을 개 좃츠로 보니까네, 그런다! 이 씨벌 놈들아!!!”


 지금 내가 보고 듣는 일은 같은 반 태현이에게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학교 친구들의 아비들이 이 다방집에서 어떻게 망가졌는지 알고 있지만 애써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그 아이들에게 지킨 예의였다. 그러나 오늘은 아주 심상치 않다. 김선주는 노름에 중독이 돼 이미 많은 재산을 잃었다고 들었다. 태현이가 아직 고등학교 1학년임에도 경찰대학을 가 경찰간부가 되고자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노름에 빠진 자신의 아버지인 김선주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새키들 오늘 내 손에 다 디졌어! 이 시팔새끼들야! 니! 니! 니! 내 찼제! 오냐! 가자! 새끼야! 내 따라 파출소 가자! 이 사기꾼 새끼야!”  


 김선주가 어느새 배씨의 바지춤을 두 손으로 꽉 잡고 다방집 홀로 끌고 나왔다. 나는 일단 뒤로 물러나 김선주가 가고자 하는 길을 터주었다. 필수 씨나 다른 노름꾼들도 같이 다방집 홀로 나왔다. 다방집 홀에서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아직도 끝나지도 않았다. 누가 들어도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미스 나 누나는 어느새 미군 존 소위 근처에 가 있었다. 김선주에게 배씨가 끌려 나오자 미스 나 누나 쪽으로 간 존 소위가 슬금슬금 누나 쪽으로 더 다가서더니 미스 나 누나를 거의 감싸 안 듯 열심히 누나를 보호했다. 나오자마자 존 소위가 누나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본 필수 씨가 갑자기 열을 받았고 다방집 홀로 나온 끌려 나온 배씨는 바지춤을 잡은 김선주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확! 마! 이 손 놓으이소! 야! 놓으라카니까? 선주님! 조은 말로 할 때 놓으이소! 야! 홍군아! 니 가마 있네!”

 “미스 나야! 니, 니는 와 거기 있는 기고? 어잉!”  


 배씨와 필수 씨의 말이 동시에 나왔다. 필수 씨는 배씨와 김선주를 말리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그대로 다방집 홀을 가로질러 달려가더니 미합중국 육군 존 스튜어트 소위의 대가리를 향해 ‘부~~ 웅’ 하고 자신의 머리를 날렸다. 모두의 눈이 아주 커다랗게 필수 씨의 놀라운 비행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아담한 키의 필수 씨와 상당히 키가 큰 존 스튜어트 소위의 키 차이는 아무리 못 봐도 15센티는 넘는 것 같았다.

 평소 그렇게 상냥할 수 없는 우리 동네 청년 필수 씨가 미군 소위의 대가리를 향해 저토록 높이 몸을 날리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방 안 모든 사람들, 특히, 몸싸움 중인 배씨나 김선주를 비롯한 미친개 홍씨와 몇몇 노름꾼들까지도 평소답지 않은 필수 씨의 놀랄만한 로켓 비행을 보고 말았다. 필수 씨는 주먹이 아니라 머리를 날렸고 존 스튜어트 소위의 턱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명중!

 하릴없던 동네 청년이 대 미합중국 육군 소위의 안면을 마치 김일 선수가 박치기로 미국 출신 프로레슬러들을 한 방에 보내듯 박아 버린 것이다. 내가 지하 다방집에 살면서 이런 놀라운 장면은 실로 오랜만이 아닐 수 없었다. 필수 씨 짱!

 다방집에 있던 미친개 홍씨를 포함한 노름꾼들, 다방집 홀 손님인 트랜스젠더 댄서인 엘라부터 백구두 제비족 미스터 민, 나, 마돈나를 닮은 미스 나 누나, 때마침 다방집 정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와 이동철 선생까지 모두 그 광경에 입을 떠억 벌리게 되었다.

 코피를 ‘퍼억!’ 뿌리며 존 스튜어트 소위는 그대로 쓰러졌다. 어허! 이런! 동네 청년 필수 씨가 자랑스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니는 남의 여자를 어디 껴안노! 이 양키 새끼야! 양키 고홈이다. 새끼야!”


 대 미합중국 육군 소위가 한국의 일개 동네 청년인 필수 씨의 박치기에 정신을 못 차리자 미스 나 누나가 신경질을 냈다.


 “아우 필수 씨 미칬나? 와 멀쩡한 손님을!”


 미스 나 누나가 말을 하는데 음흉한 배씨의 친구인 미친개 홍씨가 주인 말을 잘 듣는 개처럼 김선주의 얼굴을 순식간에 주먹으로 가격했다. 김선주 역시 땅바닥에 굴렀다. 그러자 배씨와 홍씨가 김선주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트랜스젠더 댄서 엘라가 갑자기 흥분을 하더니 예전 남고시절 한 가닥 하던 필살기를 선보였다. 그것은 권투! 나는 엘라가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몸은 여자 몸이었지만 복싱 실력은 스트립 댄스를 하면서 부드러움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라는 말은 알리의 말이 아니었다. 결국 그 이상적인 형태를 트랜스젠더 댄서 엘라가 현실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원, 투, 원, 투, 쓰리! 잽! 잽! 라이트, 레프트, 라이트, 레프트, 훅, 어퍼컷! 레프트 훅에 이은 라이트 어퍼컷으로 미친개 홍씨는 녹아웃이 되었다. 배씨는 미친개 홍씨가 여자에게 순식간에 당하자 뒤로 움찔움찔 물러났다.


 “뭐 이런 가시나가 있노? 니, 니 뭐꼬? 엉! 니 미친나?”

 “가시나? 참 나! 야! 우리 카바레 손님 중에 나한테 팁 제일 많이 주는 손님이야! 왜 때려! 너 일루와!”


 그러더니 귀신같은 원투 펀치와 어퍼컷과 함께 배씨가 일거에 무너졌다. 엘라는 스트립 댄서를 할 게 아니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인 장정구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배씨가 푹 쓰러지자 언제 들어왔는지 다방집 문 앞에 서있던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그 뒤에는 우리 학교 미술 선생인 이동철 선생도 보였다.


 “그~~~ 만!!!! 그만, 그만, 그~~~ 만!!!!!”


 나도 움찔했고 다들 멈칫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 미군 소위가 일어나더니,


  “What the!!! fuck up~! son of bitch! come on! man~~!”


 그러더니 필수 씨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것을 필두로 다방은 다시 활극 촬영장이 되었다. 김선주와 엘라가 편을 먹고 나머지 노름꾼들이 패싸움을 시작했다. 우리 학교 미술 선생님이자 우리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계신 이동철 선생도 웬일인지 우리 엄마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남자다움을 표시하려는 지 매우 큰 고성을 지르며 싸움에 참여하셨다. 온통 난리도 아닌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카바레 제비족인 백구두 미스터 민은 비굴한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살짝 정신이 나갔는지 괜히 테이블을 번쩍 들더니 다방집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어항에 던졌다. 7년을 하루같이 보살피던 다방집 어항이 박살이 나고 물이 온 사방으로 흘러내리자 드디어 내 눈에 불똥이 튀었다. 내 오늘 이것들을 다 보내버려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징글벨이 흘러나왔다.


                                                                                   …


  다방집 정리가 어느 정도 끝이 났다. 시간은 거의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스 나 누나는 이미 퇴근을 했고 엄마와 나만 남았다. 백구두 미스터 민이 어항을 깬 덕분인지 사람들이 물에 젖자 정신을 차렸는지 내가 정신없이 미친 듯 소리를 질렀는지 몰라도 패싸움은 어찌어찌 수습이 됐다.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테니 모두들 집에 가라는 엄마의 말과 함께 노름꾼들도 미군도, 복서 출신 트랜스젠더 스트립댄서도, 미술 선생도, 백구두(이 인간은 어항을 깬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으나 엄마의 말 때문에 봐주기로 한다.)도 신발이 물에 젖자 하나 둘 총총걸음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특히나 음흉한 배씨와 미친개 홍씨는 다방집 내실에 가서 얼마 남지 않은 하우스 비까지 챙겨나갔다.

 인간의 인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인간에 대해 다방집은 어느 학교보다 더 귀중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미술 선생은 엄마를 애써 위로하려고 했지만 엄마는 일단 집에 돌아가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미술 선생은 굉장히 나이스 하게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는 최대한 멋있게 사라지려고 노력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다방집 계단에서 자빠지는 소리를 냈다.

 일단, 깨진 어항은 어차피 내일이나 월요일에 다시 정리를 해서 유리를 갈아 끼우기로 했다. 또, 존 소위와 필수 씨의 싸움 중에 손상이 된 다방집 유리벽도 다시 해 같은 유리 집에 부탁해 새로 해 넣으면 된다. 그러나 몇 해간 애써 돌보고 키웠던 키싱 구라미들과 여러 열대어들은 결국 구하지 못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7년 가까이 식구처럼 지냈던 묽기들을 구하지 못해 너무 안타깝고 미안했다. 난장판을 정리하고 나서도 여기저기 엄청난 물과 함께 다방집 홀 구석구석으로 흘러들어간 물고기들을 다 찾지는 못했다.  

 나름 쓰레받기를 이용해 물을 퍼내고 밀대로 바닥을 몇 번씩 청소를 한다고 해도 아직 물이 흥건한 다방집 홀 바닥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엄마가 허기가 진다며 돼지국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아래의 인터뷰는 엄마가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 반을 반주로 견들어 마시고 나서 술이 취한 뒤 나에게 말한 것들이다. 눈이 풀린 엄마에게 내가 대호선국과 벨루아 공국에 관한 이야기를 어설피 꺼내자마자 갑자기 쏟아낸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를 쏟아낸 다음 엄마는 식당 테이블에 고개를 쿵 떨구더니 잠이 들었다.

 술이 취해 잠이 든 엄마를 업고 다방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별로 힘도 없는데 푹 늘어진 엄마를 들고 오자니 무거워서 죽을 뻔했고 한 겨울인데도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나 역시 엄마를 다방집 내실에 내려놓으며 ‘뽀옹!’ 하고 방귀를 뀌고 말았다.


                                                                          …


 이화순 씨(42세. 성재 엄마/수도 다방 마담)  :  

“성재야! 내 말 명심해서 들으렴. 놀라지도 말고, 충격받지도 말고! 방금 성재 네가 대호선국에 들렀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 벨기에 공국에 대해서도 아는 것을 보니 이제 더는 숨길 게 없는 것 같구나.”


 “솔직히 우리 대호선국에서 인간 세계에 나온 여우 인간들이 많았어. 딸꾹! 여우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둔갑술에 능했지. 뭔가 평범한 사람들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그런데, 개중에 유력한 정치인이나 재벌로 둔갑하는 여우 인간들도 있었어. 그래서 한국이나 북한, 일본의 유력 권력자들 중에는 예로부터 우리 대호선국에서 온 여우 인간들이 많았어. 나는 그들이 누군지 척 보면 알아! 같은 여우 인간들 눈에는 본모습이 보이거든. 그들은 그 나라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아. 오직 대호선국을 위해서 움직이지. 가끔 이들이 부리는 음모를 잘 살펴야 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된다구…. 딸꾹!”


 “어떻게 만나게 되었냐고 아빠를? 하하!! 네 아빠를 만난 건 이 엄마가 대호선국 비밀요원으로 훈련받고 인간 세계로 나온 지 3년이 되기 한 달 전쯤 되는 날이었어. 딱 3년이 지나면 나는 다시 대호선국으로 돌아가기로 약속이 돼 있었거든. 당시에는 택시 회사에서 경리로 일할 때였어. 인간 세계에 유언비어를 퍼트릴 필요가 있었거든. 택시기사들 중에 이상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우리 요원들이 퍼뜨린 유언비어에 감염된 사람들 인지도 몰라. 딸꾹! 하여튼, 엄마의 집안에서도 인간계에 와서 얼마간 의무적으로 생활을 해야 했는데 장녀인 내가 집안 대표로 나왔었단 말이야. 음, 엄마의 집안은 대호선국에서 군인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엄마도 인간계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대호선국으로 돌아가면 특수군 장교로 생활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택시에 놓고 내린 물건을 찾으러 택시 회사에 온 내 아빠를 처음 만나게 되었어. 흐흥.”


 “아빠가 두고 내렸던 물건이 뭐냐고? 그 물건은 우리의 적국인 벨루아 공국 사람들만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통신기였는데 나는 단박에 그가 벨루아 공국에서 온 고양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 나는 적국의 스파이라고 의심이 되는 그를 유혹해서 처치하려고 했어.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너, 너무 멋있었거든. 내 아빠가! 아흥! 우리는 뜨겁게 사랑을 했고 얼마 뒤 감사하게도 너를 가지게 되었단다.”


 “그가 우리 대호선국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던 벨기에 공국 귀족이자 비밀공작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도리 없이 나는 네 아버지를 사랑하고 말았다. 네 아버지 역시 나와의 사랑 때문에 결국 벨루아 공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었단다. 내가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있자고 했었어. 결국 시간이 많이 흐르고 말았지. 너는 기억할지 모르지만 새로 생긴 서울의 잠실 아파트로 너를 데리고 들어가 살 때는 이미 네 아빠가 대호선국으로 모종의 비밀 임무를 띠고 이곳을 떠난 지 한참 뒤였어. 나는 대호선국의 왕 호영제를 만나기 위해 네 아버지가 대호선국에 침투했다는 것은 알았다. 네가 금고 안에서 봤다던 그림은 실은 우리들의 비밀 문이야. 더 이상은 네 아빠가 말해 주지 않았지. 여기서 내 아빠의 호적상 이름은 조배일이다. 나 역시 여기 호적상 이화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그러나 대호선국에서 엄마의 이름은 모심영이야. 엄마 밑으로 여동생이 10명이나 있다. 그들 모두 군인으로 복무하거나 군과 관련해 일을 하고 있어. 이계에서도 대호선국은 대규모 군대를 가진 호전적인 나라야! 딸꾹! 아! 졸려!”     


“성재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는 아주 무서운 능력을 가진 아이다. 너는 여우 인간과 고양이 인간의 혼혈인 셈이다. 너를 키우면서 관찰해 본 결과 너는 여우 인간과 고양이 인간들의 장점들 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어. 지금 대호선국의 왕인 호영제의 능력과 비견할 만큼 큰 능력이야. 그러나, 지금까지처럼 함부로 네 능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 홍영제처럼 사악하고 비열한 여우 인간이 될지도 몰라. 언젠가 너에게 어떤 기회가 있을 때 비로소 값지게 사용해야 할 능력이다. 아무에게나 그 능력을 사용하다가는 이계와 인간계를 지탱하는 신령스럽고 신수(神樹)에 의해 큰 벌을 받게 될 거야. 너는 네 능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재야! 이 엄마가 부탁 또 부탁을 할게. 제발이다. 성재야!”  


 “아버지가 어땠냐고? 딸꾹! 어찌 됐든 네 아버지는 좋은 고양이 인간이었다. 용감했고 포용력이 뛰어나고 지혜로웠어. 나도 벨루아 공국 시절 내 아버지의 모습은 잘 모른다. 그것은 네가 벨루아 공국에 찾아가게 되면 알아보길 바래!”  


 “네가 궁금하게 생각하듯이 내가 네 아버지 사진을 갖지 않았던 것은 대호선국 출신의 여우 인간들에게 만에 하나 네 아버지의 정체가 밝혀지면 너에게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위기 속에서도 너를 여기까지 키웠다.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앞으로 너 스스로 잘 자랄 것이라 믿어. 너는 충분히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해! 이 엄마는! ”


 “참고로 20세기의 서울은 비밀요원들의 천국이었다. 미국, 중국, 일본, 소련, 프랑스, 독일, 심지어 중동이나 남미에서 온 인간계 비밀요원과 이계의 벨루아 공국, 대호선국 외에 너구리 인간들의 나라인 구일국 등 이계 여기저기에서 온 비밀요원들도 많이 나와 있어. 실제로 여기서는 간첩이라 불리는 각 국가 간 비밀 요원들끼리의 암투가 장난이 아니야. 보통 상사 주재원이거나 외교관이라는 명목으로 많이 들 와 있어! 대호선국이나 벨루아 공국이나 다른 이계의 비밀요원들 역시 인간계의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는 명목이 있어. 인간계에서 어느 지역의 중요도가 높아질수록 이계의 에너지도 집중이 돼.”


 “마지막으로 너는 고양이 인간과 여우 인간의 특징 중에서 아무래도 아버지의 능력을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그러나 너는 두 나라의 혈통을 공히 물려받은 혼혈이기 때문에 어쩌면 양측 어디에서도 심지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아버지에 대해서만큼은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벨루아 공국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신이 속한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모험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적국의 여자인 이 엄마를 만나고 나서는 너와 엄마를 위해 벨루아 공국에서 누릴 수 있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했다. 정말이야!”    


 “이제야 너에게 네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어서 미안하구나. 그러나 너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너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엄마나 너는 이미 말했듯이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한국이나 대호선국이나 벨루아 공국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할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결국 너의 능력이 완성이 돼서 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엄마는 너를 최대한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 남들처럼 대학도 보내고 군대도 보내고 결혼도 시키고 자식도 보게 할 거야. 제발 평범하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말이야!”


 나는 돼지국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마시다 술이 취한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고 눈물이 흘렀다. 코를 훌쩍이다가 기어이 코를 풀었다. 종철이에게 걷어 차인 코가 아주 아팠지만 코를 풀면서도 내가 엄마에게 더 물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아직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인간계에서나 이계에서나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할 존재라는 말을 듣고는 문득 마음이 놓였다. 어디라도 제대로 속했다면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디서든 자유롭게 살다가 별 탈 없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 열한 시간쯤 뒤에 있을 벨루아 공국의 결혼식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말처럼 평범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나는 벨루아 공국의 결혼식에 가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잠에서 깼다. 어제 술에 취한 엄마를 업고 왔더니 일어날 때 온몸이 뻐근했다. 문득 엄마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말들이 꿈에서인지 현실에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 첫차를 타고 예전 잉어를 묻어주었던 학교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 절벽 근처 숲에 갔다. 새벽에 엄마를 업고 와서 내실에 뉘이고 나서 다방집을 샅샅이 뒤져 열대어와 키싱 구라미를 찾았었다. 그들을 하얀 잉어를 묻어주었던 자리 옆에 묻어주었다.

 꿈에 백룡을 보았던 바닷가 절벽에 가서 벨루아 공국에서 받았던 검은 전자 손목시계를 풀어 동해 바다로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꿈에서 보았던 백룡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 솟구쳐 올라온 백룡은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꼭 내 키만 한 얼굴을 한 백룡은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쳤다. 나는 놀라 뒤로 넘어졌다가 겨우 용기를 내 백룡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는 텔레파시에 가까웠다. 백룡 역시 나의 능력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하며 절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능력을 봉인한다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듣다 보니 어찌 백룡의 말이 희랍인 조르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가진 힘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샤디아 공주와의 결혼에 대해서도 백룡은 내게 중요한 말을 건네주었다.



에필로그


 시나브로 1987년의 새 해 첫날이 되었다.   

 결국 현 대통령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1986년의 가장 마지막 주에 이르러 그의 생명을 유지하던 생명유지장치를 떼냈다는 뉴스특보로 나왔다. 폐렴이 심해져서 결국 손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재자 한 명 보냈다고 갑자기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했었다.

 오히려 세상은 더 혼돈에 빠졌고 노신영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행은 올해 2월 2일에 미국식 간선제를 표방한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이후,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대학가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작고한  대통령처럼 대머리도 아니면서 머리숱도 많고 귀도 상당히 큰 여당 대통령 후보는 내각제 개헌론을 접고 국민의 요구를 수용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하며 치고 나왔다.

 귀가 크면 복이 많다는 것을 선거 모토로 내세운 이 여당 대통령 후보의 선언에 국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의 요구가 성공을 한 것이라는 평가에서부터 뭔가 미심쩍다는 말까지 돌았다. 여하튼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나로 인해 저 세상 사람이 된 대통령의 친구이자 쿠데타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교묘히 숨기면서 자신이 귀가 큰 대통령의 관상이라는 말로 꾸준히 자신의 이상한 장점을 어필했다. 직선제 개헌이 전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서 야당 측에서는 여기저기 대통령 출마자들이 줄을 이었다. 야권은 당연히 집권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았는데도 사분오열로 분열했다.


                                                              …


 그리고 오늘은 미스 나 누나가 더 이상 우리 다방집에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이실직고하자면 사실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솔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밝히려고 한다. 결국 나는 벨루아 공국에서 처음 만난 페일 공작가의 일가친척과 샤디아 공주가 속한 왕가를 비롯해 여러 귀족들, 장로들, 삼상회의 사람들, 관료들, 집사들, 시녀들, 마지막으로 벨루아 공국의 수많은 국민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나는 페일 공작 4세로 거듭나 인간계로 돌아왔다. 샤론 여왕은 절친인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면 느꺼워했다. 그러나 당장 벨루아 공국에서 살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에 나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결국 나는 아버지와 비슷한 임무를 가지고 인간계로 돌아왔다. 입 꾹 다물고 여기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샤디아 공주와는 시공을 오가며 결혼생활을 유지할 것이다. 아! 그리고 벨루아 공국산 특수 안경과 강력한 검으로 변할 수 있는 벨트와 특수 운동화 그리고 새 버전의 검은 전자시계를 받았다.   

 결혼식이 있던 날, 우리 다방집은 어제 사고의 여파로 하루 쉬었다. 엄마는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러나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10시쯤 쌍화차 드시러 오시는 할아버지들에게는 어쩔 도리 없이 문을 열고 쌍화차만 챙겨 드렸다. 다방 꼴이 난리가 난 지라 연신 쯧쯧을 연발하면서도 돈을 받지 않자 고마워했다.

 나는 다방집 문 앞에 금일 휴업이라는 써붙이고 문을 잠갔다. 나는 전국 노래자랑의 첫 번째  땡! 소리와 함께 벨루아 공국의 왕실로 이동했다. 결혼식 당일, 신랑의 얼굴 상태가 엉망이었던 지라 캐산 집사를 비롯해 결혼 준비를 위해 모인 모든 집사와 시녀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고양이 인간들이 떼로 동그랗게 내 얼굴을 보던 장면을 잊을 수없다ㅏ.

 시간 관계상 내 얼굴의 상처를 과한 분장으로 지우려고 고양이 시녀 여럿이 난리를 치며 내 얼굴에 달라붙어 상당히 공을 들였다. 덕분에 얼굴에 생전 처음 떡칠이 된 화장을 하게 됐다.  그때 공주가 내가 있는 대기실로 들어왔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금색이 간간히 섞인 아이보리색에 단순하면서도 격조 있게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샤디아 공주는 머리에 드레스에 어울리는 화이트 크라운을 쓰고 있었고 손에도 보석으로 장식이 된 주얼리 스틱을 가지고 있었다. 샤디아 공주는 코가 부풀어 오른 채 턱밑에 흠집이 난 내 얼굴을 보더니 매섭게 내 눈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술이라도 마신 거야!” 나는 어깨를 쭈뼛하며,

 “미안해! 어쩌다 이렇게 됐어!”라는 말을 했다.


 샤디아 공주는 그제야 인상을 풀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아!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성과 말 그대로 포옹을 하게 되었다. 첫 키스에 이어 샤디아 공주와는 처음 해보는 게 너무 많았다. 마음을 놓고 긴 시간 그녀가 나를 안아주자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도 그녀를 두 팔로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고 머리까지 천천히 쓰다듬게 되었다. 17살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깊은 감정이 끓어올랐다. 괜히 눈물이 어렸다. 내 눈을 보자 그녀 역시 눈물이 어린 눈으로 나에게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오지 않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어!”

 “사실 나, 정말 고민을 많이 했거든!”

 “야! 참 나! 그걸 신부 앞에서 할 말이니! 뭐가 됐든 이것만 약속해! 앞으로 내 말 잘 들어야 해!”

 “어! 어!”


 나는 공주와 포옹을 한 채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성대한 결혼식이 끝나고 샤디아 공주의 비행차를 타고 이계의 세계수인 신수(神樹)를 들리는 일종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처음으로 페일 공작가에 방문했다. 커다란 대저택이었다. 비행차가 페일 공작가 대저택의 주차장에 내렸다. 일가친척들이 도열해 있었다. 정말이지 엄청 많은 남자 사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나랑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었다.

 간혹 악수를 하며 질시의 눈을 가진 남자 사촌을 발견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여기서도 이런 눈을 발견하게 되다니 서글펐다. 그래 나는 그나마 주민등록번호가 10로 시작하는 서울 남자라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저택 2층의 가장 큰 집무실에 걸려 있는 유화로 된 아버지 초상화를 봤다. 태어나 처음 아버지의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이 되었다. 나는 한참을 아버지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내 옆에서 샤디아 공주가 나의 팔에 팔짱을 끼며 그녀의 머리를 내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



Underground Boy

– 다방집 소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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