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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Jan 13. 2024

[독서]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모퉁이 인간 상훈을 이해하며

1.

워낙 문상훈 감성과 취향을 좋아했던터라 (빠둥이맞음) 제발 책 내주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드디어 작년 12월 27일 문상훈의 수필집이 세상에 나왔다. (당연히 1쇄와 선착순 엽서 특전 받음)


취향 저격일건 당연했지만,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냅다 훔쳐가서 들여다보고 쓴 것 처럼 읽힐 줄은 몰랐다. 상훈도 그렇게 많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삼켰겠구나 싶어 이 책을 빠른 속도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그의 표현을 빌려 그의 글이 참으로 안쓰러워서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다.


간혹 상훈의 글은 너무 우울해서 내가 감히 이 마음을 읽어도 되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어디가서 우울로는 지지 않는 나임에도 상훈의 글은 꽤나 아프고 가녀려서 나를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것처럼 다음 문장을 읽을 수 없게 한다. 글을 읽는 것에도 마음의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는걸 또 한번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이 글을 세상에 내보인 상훈이 주변 사람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상상을 한다. 상훈은 내가 주로 주변인들을 걱정시켰던 것 처럼 나를 걱정하게 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인 것만 같다.


2.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발췌

곱씹어 읽느라 아직 두개의 챕터만 읽었는데,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꼭지의 한 부분. ‘올 때가 된 것도 아니고 오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기다리고 있다면 내가 더 반갑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늘 그랬다. 어떤 때에는 기다리는 대상이 특정되었고, 어떤 때에는 어렴풋했다. 어떤 때에는 기다리긴 기다리는데 무얼 기다리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열심히 기다린다. 그러다 그 기다림이 끝나면 내 앞에 서있는 당신의 눈을 보며 온 몸으로 웃는다. 환대한다. 아, 내가 기다렸던 존재가 바로 당신이었군요.


기다림은 종종 기대로 변했다. 당신의 등장을 이렇게나 오래 기다렸어요. 드디어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나요? 얼마나 근사하고 눈물나게 아름다울지 너무 기대돼요. 그런 기대는 실망으로 변하기도 했다. ‘기다리는 사람’인 내게 기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보단 기다림의 끝에 서있는 사람을 더 반갑게 환대하기 위한 갈증과 노력의 시간으로 기록된다. 맥주를 최고로 맛있게 마시기 위해 운동복을 입고 나가 달리기를 하고 물 한 모금 안 마신채로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딴다. 그 때, 첫 입을 적신 맥주가 예상과 다르게 미지근하다던가 김이 빠졌을 때. 차라리 기다리지 않았다면 실망은 하지 않았을텐데. 맛없다, 하고 말았을텐데. 사실은 억울한 마음까지도 드는 그 순간에 손에 들린 김빠지고 미지근한 맥주를 미워하진 않았을텐데.


그래서 당신은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당신을 기다렸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실망할까봐, 그래서 당신이 이유도 모른 채로 내게 미움받을까봐. 내사랑의 또 다른 단어인 밉다는 말을, 당신이 잘못 알아듣고 내게서 떠날까봐 나는 당신만큼은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당신으로부터 닿은 연락 한 통에 나는 목각인형처럼 굳어버렸다. 아 맞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지. 차라리 열심히 기다릴걸. 나는 내가 당신을 기다린 줄도 몰라서 당신을 환대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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