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어른이 된다는 건
“전업작가가 되면 어떤 글을 쓰고 싶어?”
퇴사를 하겠다는 말에 아내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간 글을 써서 영상으로 완성된 이야기들은 적어도 겸업을 했기에 큰 부담 없이 이룬 작은 작품이었다. 독립영화와 웹드라마 등 성취가 보상보다 큰 작업이 위주였기에 전업을 희망하는 입장에서 미래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열차가 어찌나 빠른 지 따뜻한 햇살에 봄을 느끼며 눈을 깜빡이면 어느새 얼굴 위에 내리는 하얀 눈송이와 크리스마스 멜로디가 들려오게 되었다. 그렇게 한 살을 더 먹고, 정작 내 머릿속 상자에 봉인된 이야기들을 하나도 세상에 꺼내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했을 때 나는 무작정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좋겠네. 아직 소년 같은 열정이 있어서.”
아내의 질문에 대해 고민을 좀 해보았다. 호텔 매거진 에디터로 있을 때 현업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알아낸 재미있는 산업 구조와 구성원 간의 갈등을 바탕으로 한 기업정치물, 아버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회귀물, 사계절 동안 여행지 취재를 나가며 감정의 변화를 겪는 에디터와 포토그래퍼의 로맨스물… 등 숱한 시놉시스를 보며 차근차근 이 이야기들을 전부 쓰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다 쓰고 나면? 그때는 또 어떤 아이디어가 나를 찾아오게 될까? 만약 찾아오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그럼, 그렇게 된다면, 다행히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작가가 된 상태라면, 나는 우미노 치카의 <허니와 클로버>와 <3월의 라이온>을 드라마로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는 아다치 미츠루라고 믿었지만 2010년 전후로 그 타이틀은 우미노 치카가 가져갔다. 일본의 ‘잃어버린 십 년’의 여파로 미술대학에 다니는 스무 살 학생들의 현실적 고민을 다룬 <허니와 클로버>, 부로를 잃은 십 대 일본 장기 기사가 성장하며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어가는 <3월의 라이온>. 단 두 작품으로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일본 현지에서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화를 이끌어낸 IP다. 평소 남의 작품에 크게 질투하지 않는 편이지만, 우미노 치카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전율은, 내가 꼭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서일까. 페이지 하나하나를 넘기면서 어쨌거나 국내에 들여온다면 장기를 바둑으로 바꾸는 등 현지화를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하곤 했다.
우미노 치카에 빠져든 계기는 본편 스토리의 훌륭함도 있지만, 별책부록처럼 삽입된 단편 에피소드에 담긴 번뜩이는 삶의 고찰이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허니와 클로버>에 나오는 로마이어 선배의 놀이공원 에피소드다. 주인공들의 대학 선배인 로마이어는 키가 크고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상남자 캐릭터다. 호탕한 웃음으로 모두를 감싸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을 굶기지 않을 것 같은 든든함이 매력인 남자. 그런 인간적인 매력에 대부분의 캐릭터가 그를 좋아한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로마이어는 언제나 가게 주인에게 붙잡혀 계속 함께 해달라는 부탁을 들을 정도. 그런 로마이어가 하루는 망해가는, 허름한 테마파크의 인형 마스코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이 테마파크의 마스코트는 작가 콘셉트의 고양이. 부드럽게 펌이 된 헤어가 인상적인 고양이는 대대로 작은 체구의 남자가 인형탈을 쓰고 연기를 해 귀여움을 어필했었다. 하지만 덩치가 큰 로마이어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자 마치 호랑이가 된 듯 듬직하고 우람한 고양이가 썰렁한 놀이공원을 돌아다니게 됐다. 단편이 가지는 짧은 반전의 미학. 당연히 로마이어의 고양이는 테마파크의 명물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방문하게 하는데… 기존의 아이나 여성 방문객은 물론, 나이 든 50대 직장 남성이나 야쿠자 보스 등이 추가 됐다. 기존의 마스코트라면 어려웠겠지만 로마이어의 고양이는 번쩍번쩍 성인 남성도 안아 들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놀이공원에서 고양이 캐릭터에 안겨 사진을 찍는 남자들. ‘남자가 어른이 되면 누군가를 안아줄지언정, 정작 본인이 누군가에게 안길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절묘하게 담아낸 에피소드였다.
어느새 마흔이 되고 작품의 내용처럼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전무해 보인다. 대신 아내를 안아주고, 어머니를 안아주고, 평소라면 상상도 못 했지만 조금씩 작아지는 체구의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안아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내 아이를 안아주려 한다. 언젠가 이 아이도 나이가 들면 누군가를 안아줄지언정, 안길 수 있는 날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괜히 서글퍼져 꽈악 한 번 더 힘주어 안아주게 된다.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안아달라 하며 아이가 버릇 나빠진다고 하지만 오늘도 아이를 번쩍 안아 든다. 아직은 온전히 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