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에 대한 단상
지난 연말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총회에 처음으로 나갔다. 매년 평일에 진행하다 보니 직장인이었던 나는 참석하기 쉽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마침 백수여서 옳거니 하고 길을 나섰다. 워낙 업계 사람들과 교류가 없었던 터라 무척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까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영화든 크레디트에 단독으로 각본이 올라오는 일이 드물다. 제작사든, 감독이든 만나면 작가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할 일이 없는 작가는 왠지 아웃사이더 느낌이 강하다. 작품에 대한 권리라든가, 공헌도라든가 제대로 된 보상과 명예를 위해 조합원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이 그래서 더욱 생경했다.
총회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작가분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차분했다. 누군가 주도해 떠들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신입이었던 나는, 그러나 평소 에디터 생활로 온갖 인터뷰를 경험했기에 궁금했던 것을 물으며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그때 갑자기 MBTI 관련 말이 나왔고 내가 ‘E’ 임을 밝히자 다소 놀란 분위기였다. ‘이 모임에 E 성향은 없는데…‘ 농담이겠거니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전부 I일 수가 있어요?” “어, E인 작가는 답답해서 자기가 직접 감독하러 가버렸거든요. 그래서 남은 작가가 전부 I인 거죠.”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되지 않은 말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 가지 혈액형보다는 나은 열여섯 가지의 성향 구분법. 혐오는 줄고 상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긍정적인 요소가 그나마 있는 편이다. 헌데 이 구분법이 아이들에게 까지 적용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예부터 아이 사주는 보는 게 아니라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내 아이가 어떤지 알고 싶은 마음이 크다. 뱃속에 있을 때 성별은 물론 유전자 검사로 이런저런 정보를 사전에 알아내는 요즘, 몇 년 전부터 유행했던 MBTI가 곁들여졌다.
숏츠로 유행한 테스트 중 ‘엄마가 슬퍼서 빵 샀어’가 있다. 아이가 그 말을 듣고 슬픈 이유를 먼저 물으면 공감 능력이 높은 ‘F’, 빵 그 자체에 집중하면 ‘T’라고 판단하는 것. 대체로 남아는 빵 종류가 무엇인지 묻거나 자기가 먹게 될 줄 알고 기뻐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아는 엄마의 감정에 대해 물었다. 물론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판단이 아니다. 그저 MBTI를 핑계로 귀여운 아이들의 반응을 보는 테스트일 뿐, 개인적으로는 그저 남녀의 성향 차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의 아이에게는 두 달 차이의 여사촌이 하나 있다. 아마 동렬의 친인척은 단 둘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이. 그래서 더욱 자주 교류하고 성장을 함께 지켜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둘의 성장의 차이보다 성정의 차이가 눈에 띈다. 최근 사랑스러운 여조카가 동서와 어린이대공원에서 하는, 개구리가 주인공인 연극을 보러 갔다고 한다. 극이 한참 절정으로 치달을 때쯤 엄마개구리가 뱀에게 덜컥 물리는 장면이 나왔다. 다시 한번, 사랑스러운 여조카는 그 장면에 심히 감정을 이입해 폭풍오열을 했다. 이는 다른 세련된 어린이 관객들의 관람을 방해할 지경에 이르렀다. 성실하며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동서는 당장 아이를 안고 극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에피소드를 전해 들었을 때 아내와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여조카가 대성통곡하는 모습과 당황하여 그녀를 안고 나오는 동서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기 때문이다. 엄마아빠가 웃자 궁금했는지 나의 아이는 연유를 물었다. “OO이 연극을 봤는데, 글쎄 엄마개구리가 뱀에게 물리는 순간, 엄청 크게 울었대!” 아이는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되물었다. “엄마개구리 어디가 물렸대? 다리?” 아… T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