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아이와 함께 빛나던 순간
지난 5월 지인의 제안으로 가족을 떠나 3박 4일간 베트남 달랏을 여행했다. 공항으로 떠나긴 전 인사를 나눌 때 아이가 대뜸 “아빠, 베트남 호랑이 조심해요!”라고 말했다. 베트남에 호랑이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 물어본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그리고 10월이 되어 우리 가족은 태국 치앙마이로 ‘삼주살이’를 떠났다. 걱정이 많고 결정을 명확히 내리지 못하는 아내는 보름은 짧고, 한 달은 길다며 22일간의 여정을 선택했다. 보름과 한 달, 중간 그 어딘가의 여행이 되어버렸다.
태국 제2의 도시이자, 팬데믹 이전부터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로 유명한 곳. 푸릇푸릇한 식물과 란나 왕국의 유적, 요가와 예술가들의 도시라 불리는 치앙마이가 아이의 첫 해외여행지로 결정됐다. 왜 하필 치앙마이냐며 묻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농담 삼아 “요즘 애들이 어른되어서 자기들끼리 ‘너 해외여행 어디로 처음 갔어?’라고 물으면 죄다 괌 아니면 다낭을 얘기할 것“이라 대답했다. 요즘은 환율과 비행시간 때문에 일본이 더 많은 듯 하지만, 그래도 출산 후 첫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 언제나 괌과 다낭이었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거다. 나는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비행시간으로 생각해 보면 타이베이나 마카오 등이 후보지였으나 도시의 이미지나 아이와 함께하는 ’첫‘ 해외여행지로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십 년쯤 뒤에 누군가 아이에게 ”너 해외여행 언제 어디로 처음 가 봤어?“라고 물으면 ”나? 세 살 때 치앙마이 가서 한 달 살기 했었어. “라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침 회사 업무에 지친 아내가 하반기부터 육아휴직을 신청한 덕에, 다시없을 기회라 여겨 치앙마이에서의 한 달 살기를 추진했던 것이다.
항공권을 예매한 한 달 전부터 아이에게 비행기를 타고 멀리 태국으로 여행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실감하지 못하던 아이도 여행 일주일을 앞두고는 조금씩 들뜬 모습이었다. 짐을 꾸리다가 문득 베트남 달랏 여행이 떠오르고, 마침 골려주고 싶은 생각에 아이에게 태국에도 호랑이가 있다고 말했다. 놀란 눈을 한 아이는 베트남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나는 태국에도 호랑이가 있고 걔네는 모두 인도차이나호랑이라고 알려주었다. 겁을 먹은 아이는 저녁 아홉 시가 되면 불 끄고 조용히 잘 것이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 어린이집도 안 가고 매일 낯선 도시에서 신나게 놀아서인지 여행의 절반이 지난 지금까지 아이는 그 약속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물론, 한국 시간으로 따지면 밤 열한 시쯤이니 푹 잠이 들만하다.
여행지라서일까.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아이가 잠든 후 아내와 도란도란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상하게 태국 맥주는 잘 취하지도 않는다며 술 못하는 아내가 가볍게 한 병을 비워낸다. 일정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갑자기 아내가 물었다. 지금까지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았느냐고. 아내는 예술인 마을인 반캉왓(Bann Kang Wat)에서 내가 보채는 아이를 홀로 돌보며 그녀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을 때라고 말했다. 젊었을 적 패션매거진 어시스턴트를 했던 사람이라서 그런가. 육아에서 벗어나 옷과 수공예품, 액세서리 등을 사거나 구경할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아내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치앙마이에 도착한 다음 날 오후, 아이와 콘도 수영장에서의 순간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해외여행이라면 글로벌 브랜드의 호텔을 선택하거나 했을 텐데, 삼 주라는 시간은 완전히 다른 장르의 여행 준비가 되었다. 특히 아이가 함께한다는 점에서 숙소를 검색할 때 필수 조건이 명확해졌다. 3인 숙박이 가능해야 하고 반드시 수영장이 있을 것. 해당 조건을 만족하는 님만해민 내 콘도에서 십여 일을 머물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는 숙소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수영장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가 식사를 마치고 들어와 곧장 수영장에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 사이 아내는 마사지를 받으러 나갔고, 아이와 나는 이 아담한 수영장을 전세 낸 듯 단둘이 물속을 헤엄쳤다. 그러다 툭, 툭. 아이가 장난 삼아 나에게 물을 뿌린다고 생각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하늘은 맑지만 머리 위로 잠시 내리는 여우비. 혹여 추위를 탈까 비치타월로 아이를 감싸 안고 처마 밑에 앉아 비를 피했다. 후드득 소낙비가 되어 내리는 빗물이 수면을 두들기고, 두 사람은 가만히 그 리듬을 듣고 있었다.
“이거는 여우비야. 오늘 호랑이 결혼하는 날이야?“
먼저 침묵을 깬 건 아이였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 전개에 나는 살짝 놀랐다. 누구에게 그런 걸 들었냐고 물으니 “할머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태국에 사는 호랑이도 장가를 가고 언젠가 아이를 낳겠지. 그리고 잠시 스치는 여우비처럼 쉽게 잊힐 순간도 평생의 기억으로 가져가겠지. 초록초록한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고, 서서히 가늘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아이의 따스한 체온을 고스란히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이 이번 여행의, 내 인생의 잊지 못할 한 장면임을 깨달았다.
“아빠, 빨리 수영하고 싶어요! 나 발 안 닫는 데까지 수영해 볼래.”
비가 그치자 내 품에서 벗어나 아이가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가끔 울고 보채고 말을 안 들으며 화나게 하지만, 웃고 즐거워하다 푹 잠이든 모습을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 뒤에서 가라앉지 않도록 잡아주어야지. 아이에게는 이 여행이 그저 시작이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