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분마다 도파민 폭발하는 콘텐츠를 만들다 보니
2023년 3월 10일 나는 10여 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야생으로 나왔다. 이직을 준비한 것도, 바로 들어갈 프로젝트가 있던 것도 심지어 실업급여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짬짬이 써온 시나리오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겠다 싶어 과감히 결심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명민한 빛은 없지만, 어차피 빚도 없는 상황이니까…
개업빨(?)이라고 해야 하나. 6월까지는 다양한 곳에서 연락이 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자기개발서의 웹드라마 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정보성 유튜브 영상의 초벌 자막을 만들기도 했다. ’이 정도면 월급보다 나쁘지 않네’는 생각이 살짝 들 만큼… 하지만 여름이 되자 말끔히 나를 찾는 곳이 사라졌다. 장강명, 김은희를 좋아하지만 걱정도 많은 나의 아내는 퇴사에 대해 생각보다 쿨하게 받아들였다. 내 꿈을 응원한다 거나, 가정 경제에 대한 불안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작년 연봉만큼만 벌어와. 그럼 되지 뭐.(퇴직금 제외)’라고 했다. 출판 업계에 있다 보니 연봉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부담이 되는 액수. 퇴사 초기 기세라면 문제가 안 되는 금액인데 여름 내내 놀다 보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심히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올 무렵에야 차가운 현실을 깨달았다. 호기롭게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바람은 육아가 곁들여지며 더디게 진행됐다. 영화는 죽고, 드라마 역시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경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는 없었다. 그러다, 11월의 끝자락에서 한 프로덕션 대표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숏폼드라마라고 알아?”
틱톡으로 대변되는, 인스타그램의 릴스와 유튜브의 쇼츠처럼 세로형 화면에 자막 중심의 제작 전달, 타이트한 앵글과 상상을 초월하는 빠른 전개… 숏폼드라마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크게 성장한 미디어 산업군이었다. 보통 유튜브의 웹드라마 한 화가 10분 내외로 제작된다면, 숏폼드라마는 이보다 짧은 1분 30초 내외다. 총 화수는 대략 50~60화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려면 일반 영화 한 편 시청하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절대 영화를 50화로 쪼개놓은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히 그 차이를 알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써보니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숏폼드라마의 대표주자는 ‘릴숏(Reelshot)’과 ’ 드라마박스‘로 2022년부터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 말로만 들으면 휴대폰에 최적화된 넷플릭스 같은 세로형 ott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이런 숏폼드라마 플랫폼의 BM은 웹툰과 유사하다. 1~5화까지는 무료로 공개해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후 나머지를 화당 결제하게 만드는 시스템인 것. 그렇기에 1~5화 사이에 압도적인 도파민을 폭발시켜 관심을 끌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 미쳐서 어쩔 수 없이 화당 300~500원의 결제를 유도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는 씨알도 안 먹히고, ‘이런 이야기가 과연 흥미로울까요?’도 안된다. 무조건 ‘이런 이야기면 미치고 환장해서 볼 겁니다!’는 되어야 간신히 기획 단계에서 컨펌이 된달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 나도 그걸 알고 싶지 않았다.
11월에 연락을 받아 한 달이 안 되는 시간에 총 50화짜리 숏폼드라마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미 나와 있는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써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숏폼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이 큰 문제였다. 가장 많이 참고한 건 중국에서 흥행한 막장 숏폼드라마와 한국 웹툰이었다. 촬영 전날까지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것까지가 나의 임무. 이후 캐스팅, 촬영, 편집까지 급하게 진행했지만 그래도 국내 최초 숏폼드라마 플랫폼 론칭 기한에 맞춰 만든 작품이었다. 결과는… 아무래도 숏폼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제작자나 소비자나 아직은 부족한 듯하다.
’ 회. 빙. 환‘으로 대표되는 근래 국내 웹툰 시장과 마찬가지로, 숏폼드라마 역시 낯설고 새로운 스토리를 바라지 않는다. 익숙한 흐름 속에서 액션이든, 복수든, 성적 자극이든 카타르시스가 팡팡 터지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그렇기에 주인공의 고난은 없거나 최대한 짧아야 하고, 이에 대한 복수의 사이다는 무엇보다 시원하고 탄산이 터져야 한다. 주인공 외에 서브 캐릭터들의 서사가 길어지는 것도 금물. 마치 일인칭 주인공시점의 소설처럼 단순히 외길을 따라 1분 30초가 진행되어야 한다. 어떻게든 새롭고, 시대정신이 없다면 트렌드라도 반영해서 만들고자 노력하는 기존의 작가들이 하기에는 더없이 힘든 작업일 수밖에 없다. 클리셰를 따라 그저 흘러가는 세로 화면의 이야기… 정말 이런 걸 해야 할까 회의감이 들 때쯤 아이와 함께 넷플릭스를 보다 두 번의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핫휠 렛츠 레이스> 애니메이션을 볼 때다. 미니카 장난감으로 유명한 ‘핫휠(hotwheels)’ 사에서 제작 및 투자한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아이들이 각자 핫휠 레이싱 카를 타고 아카데미에서 우승을 위해 경주를 하는 내용이다. 시즌1의 흥행에 힘입어 시즌2와 최근 공개되었는데, 문제는 시즌2에서 생겨났다. 시즌1에서는 함께 아카데미를 다니는 친구들끼리만의 경쟁이었다. 그래서인지 경기마다 주인공이 우승하지 않고 라이벌이나 여타 다른 캐릭터가 승리를 차지해도 아이는 즐겁게 시청했다. 하지만 시즌2에 본격적인 악당이 등장하고 1화부터 엄청난 기세로 승리를 쟁취하자 아이는 울상이 되어 시즌2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과거 서사는 주인공이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어 마침내 성공을 이뤄내는 이야기 흐름이 당연한데, 세 살 먹은 내 아이부터 주인공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레고 <닌자고> 애니메이션을 볼 때다. ‘하루에 한 편’이라는 원칙에 따라 작품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명 전체관람가이긴 하지만 <닌자고>의 스토리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특히 어떤 화에서는 인물들의 과거를 회상 형식으로 보여주며 다소 복잡한 플롯을 선택했는데, 아이는 그 화가 끝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인물의 과거가 슬퍼서도, 이야기가 어려워서도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레고 블록이 파편화되어 날아다니는 액션 장면을 조금도 볼 수 없는 에피소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영상 시청 횟수를 날린 것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숏폼드라마는 매 화마다 충분히 도파민을 얻지 못하면 외면받는다는 사실에 상심하고, 다시는 숏폼드라마를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우스울 만큼, 앞으로 자라 성인이 될 내 아이부터 저런 콘텐츠를 원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결국 드라마든, 영화든,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변해가지 않을까 문득 두려워졌다. 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변하지 않고 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