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노래에서 다른 의미를 깨닫는 순간
할머니의 가족은 일본에 살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버블 절정의 시대라서일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나에게도 선뜻 선물을 보내준 것을 보면. 내가 열두 살쯤 나는 딱 카세트테이프 사이즈의, 호평받는 돈까스 반죽처럼 아주 얇고 작은 소니 워크맨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나는 신승훈의 데뷔 무대를 실시간으로 볼 만큼 가요를 좋아했었다. 신승훈, 김건모, 이승환, 윤상, 윤종신, 토이... 발라드라 퉁쳐지는 노래들을 중심으로 테이프가 잔뜩 늘어지도록 반복해 들었다. 사춘기 때는 가사에 몰입에서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다. 그때의 가사들은 왜 목숨처럼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사랑의 완성이라 외쳐댔을까.
음악에 대한 선호는 삼십 대 이후 바뀌지 않는다는 뉴스가 잠시 떠돌던 시절이 있었다.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여전히 그 시절 가요를, 정확히는 그 당시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수가 정규 앨범을 낸다면 많게는 15곡에서 적게는 8곡은 냈어야 했는데 아무리 발라드 가수라고 하더라도 발라드 곡만 주구장창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2집 앨범을 냈을 당시의 신승훈은 콘서트 마지막 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랑>이었을 때 관객들이 쓸쓸하게 퇴장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3집 앨범에 나름대로 빠른 <처음 그 느낌처럼>을 넣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가수들의 앨범을 찾아들으며 보사노바, 살사, 맘보, 왈츠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알게 됐다. 화려한 브라스를 자랑하는 김현철,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향연인 김동률 같은 훌륭한 작곡가의 노래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요즘은 그런 웅장한 노래가 왜 안 나와요?" 지인인 인디 가수에게 물었더니 빠른 답변이 돌아왔다. "싱글 하나 내는 데 세션 일당주기 쉽지 않아요." 정규 앨범이 아닌, 싱글로 디지털 음반을 내는 요즘 가수들에게는 노래 한 곡에 많은 제작비를 투자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한 번의 실패도 두려운 지라, 늘 잘하는 것만 계속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된다.
여하튼 핑계가 길었지만, 그래서 내가 열 살 때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 들었던 노래만 듣는 나날이 마흔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 바꾼 자동차는 마침 미국에서 생산된 것이라 보기 힘든 CD 플레이어가 탑재되어 있어 소장한 앨범들을 하나씩 아껴가며 다시 들어보았다. 빠르다 생각했던 노래는 생각보다 템포가 느렸고, 문방구 앞 불량식품 같은 사랑 이야기도 있었다. 또 어떤 곡은 지금도 여전히 세련되어 깜짝 놀라기도 하고, 너무나 처절한 가사에 '무슨 사랑이 저래'라고 웃음이 나올 때도 있었다. 마흔이 되어 스무 살 때처럼 사랑 이야기를 쓸 아이디어도 감성도 무뎌진 나는 유독 그런 가사들의 공감대가 떨어졌던 것. 그러던 중 임창정의 <나의 연인>을 듣다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제발 언제나 처음 내게 오던 날처럼 기쁨으로 내게 있어줘. 이젠 나보다 너를 사랑한다는 그 말 모두 이해해 너무 사랑하니까.
'이건 아이에 대한 이야기구나...'라는 걸 깨닫자 가사가 알알이 씹혀 다른 맛을 냈다. 어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눈물이 팽-하고 맺힐 정도. 차에서 내려 곧장 검색을 해보자 실제 작사가가 딸을 대상으로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이후 예전에 좋아했던 노래들을 찾아 들으며 가사의 대상을 연인에서 아이로 모두 치환해 보았다. 권순관의 <A door>는 결혼식장에서 딸아이 손을 잡고 걷는 아빠의 마음 같다는 등 마치 만해의 <님의 침묵>의 '님'을 찾아 헤매는 여정처럼 가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중 최고는 바로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윽고 내가 한눈에 너를 알아봤을 때 모든 건 분명 달라지고 있었어. 내 세상은 널 알기 전과 후로 나뉘어. ... 나는 있잖아. 빈틈없이 행복해. 너를 따라서 시간은 흐르고 멈춰.
아니! 이 노래를 왜 여태 사랑 노래로 알고 있었던 거지. 누가 봐도 '출산 및 육아 후기'가 아닌가! 그렇다. 사랑의 호르몬이 부족해지거나, 다 써먹어 더 이상 우려낼 것 없는 연애 경험을 대신할 것은 새롭게 찾아온 사랑,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비로소 나도 다시 멜로를 써도 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오랜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것 같았던 내 눈물샘에도 어느새 소나기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