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종인 Oct 16. 2024

취향의 타협

맥주와 커피와 위스키와 와인 그리고 시간을 소비하는 모든 것

시작은 맥주였다. 편의점 수입맥주 ’네 캔에 만 원‘ 선이 무너지며 의문을 가졌다. ’과연 나는 맥주를 좋아하는가?‘. 모두 같은 가격일 때는 선호하는 브랜드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만 원을 넘어서자,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맥주를 찾게 됐다. 그렇다고 각종 지역명이나 B급 감성의 이름을 단 수제 맥주를 마시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로컬 크래프트 맥주를 찾아 마시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건 바싹 마른 목구멍을 타고 적시는 따끔한 라거 한 모금. 대중적이지 않거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할인 폭이 큰 라거 맥주만 종종 마실 뿐이었다.


커피에 대한 취향은 더 극적으로 변했다. 대학 시절 종로 씨네아트홀 근처에는 내가 제일 좋아했던 ’카페 뎀셀브즈‘가 있었다. 그곳에서 신선한 커피의 맛과 향을 경험하고 나서는 다양한 로스터리 카페를 찾았다. 보헤미안, 테라로사, 커피리브레, 프릳츠… 뉴욕에 있을 때는 에이스호텔 일 층에 자리한 스텀프타운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스페셜티 커피와 추출 방식에 대해 공부했고, 에디터로 일할 때는 커피 전문점 R&D 담당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지식을 늘렸다. 하지만 팬데믹 전후 카페가 점점 공간을 소비하는 장소로 변모하고 커피 맛보다 빵 맛이 더 중요해지자, 카페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쇄기를 박은 건 아이의 탄생. 더 많은 경험을 시켜주겠다는 명목으로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많은 카페를 방문했지만 나의 우선순위는 이전과 달랐다. 노키즈존인지 아닌지, 주차가 편리한지, 가격이 지나치게 높지 않은지… 커피 맛이 순위에 끼어들기는 이제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택이 단순해진다. 간단히 마실 티백은 뎀셀브즈, 약간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드립백으로 테라로사만 선택한다. 지인에게 캡슐커피 머신을 얻어 온 이후에는 가성비 좋은 킴보 캡슐을 주로 마신다. 전 직장에서 마시던 제품이라 그런지  아침에 한 잔 할 때면 곧장 책상에 앉아 글을 써야 할 기분이다.


최근까지 가장 꾸준히 즐기는 건 위스키다. 입문할 당시에 우리나라는 싱글몰트 위스키가 유행하던 중이었다. 치기 어린 마음에 발렌타인이나 조니워커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는 배척하고, 맥켈란, 오반, 카발란 같은 싱글몰트 위스키만 찾았다. 또 홍어의 맛을 깨닫듯 피트 위스키에서 단 맛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 아드벡, 라프로익을 사 모았다. 매거진 에디터 시절 해외 출장이 많아 면세점을 들러 위스키 한 병을 사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스무 살에 읽었던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정도로 푹 빠진 위스키. 그러던 어느 날, 발렌타인과 조니워커를 다시 맛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이렇게 완벽한 밸런스라니! 그간 애써 내 취향이 싱글몰트라 했던 믿음이 무너진 순간이다. 결국 나는 향기롭고 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감도는 고도주를 좋아했던 것이다. 뭔가 부끄러웠다.

에디터를 관두고, 코로나19로 해외여행 빈도가 줄어들면서 나의 컬렉션도 멈춰 섰다. 오래 숙성된 위스키 가격이 점점 높아지는 것도 문제. 결국 내 입 맛에 가장 잘 맞는 건 버번위스키 중 ‘우드포드’였다. 위스키가 재테크 수단이 되는 요즘 상황에서 취향을 더 펼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위스키가 이 정도인데 와인은 말해 무엇하랴. 내추럴 와인은커녕, 어느새 국가와 품종도 정해두고 그것만 마시게 된다. 레드는 이탈리아 몬테풀치아노, 화이트는 뉴질랜드 말보로 쇼비뇽 블랑. 새로운 와인을 만나는 일이 더 이상 두근거림이 아닌, 불편한 자리에 나서는 기분이다. 종종 자리하는 지인 중 하나가 모임에 와인을 자주 가져온다. 그가 소개하는 와인은 하나같이 맛이 좋고 부담스럽지 않다. 좋은 기억으로 남은 와인이라 가끔 기록해 두었다가 구매해 집에서 혼자 맛보는데 그때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보관법이 달라서일까? 지인의 오픈 타이밍이 뛰어나서일까? 궁금한 마음에 지인에게 물었더니 답변은 단순했다. “나도 그래요.”


최근 유료 콘텐츠 플랫폼 두 곳이 문을 닫았다. 이와 관련된 SNS 글에서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콘텐츠를 파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시간을 산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아무리 높은 퀄리티의 콘텐츠를 작성한다고 해도 이를 보는 이들의 시간을 뺏을 만큼 매력적인지 고민을 했어야 한다는 것. 심지어 어떤 유료 콘텐츠는 무료 콘텐츠와의 차별성도 크지 않았다. 취향도 마찬가지. 결국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않고 같은 곳을 맴돌며 타협해 가는 것은 취향을 나누고 함께 즐길 이들과, 이들이 나눠줄 시간이 없어서다.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몇 시간씩 영화와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떠들거나, 야장에 앉아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거나, 아버지 양주 컬렉션 중 하나를 들고 와 밤새 비우거나, 비싼 와인 한 병이 바닥을 보였을 때야 완전히 열린 상태의 맛을 알게 되는 일… 마흔을 지나 더는 없을 그리움으로 나의 취향은 점점 더 견고해져만 간다.  

이전 02화 당신의 결핍은 무엇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