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를 정의하는 자신만의 방법
‘노포’라는 말에 주목하게 된 건 박찬일 작가의 <백년식당>을 읽고부터다. 일본말의 잔재라고도, 그저 낡고 허름한 오랜 식당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는 등 논란이 제법 있었다. 저마다의 기준과 판단으로 ‘노포’를 정립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을 하며, 나의 노포는 무엇인지 되물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바로 ‘이문설농탕’이었다.
피맛골에 자리한 낡은 이 층짜리 건물이 어린 내 기억에 남아있다. 방학이면 아버지 홀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종로에 갔다. 그리고 극장에서 여름방학 특선영화를 보여주었다. 출출해진 우리를 위해 아버지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라며 이문설농탕을 찾았다. 1902년 개업이라 당시에는 백 년이 되진 않았지만 기름지고 끈적한 테이블과 소의 누린내 그리고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따뜻하고 맛있던 국물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그 이후 성인이 되어 방문했을 때는 맥도날드 빌딩 옆 골목길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추억이 머무르지 않아서일까. 더는 생각이 자주 나지는 않았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미식가가 유독 많았다. 나보다 열 살은 많은 사람들이라 페이스북을 꾸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게시물을 보면 아버지와의 일화, 특히 아버지와의 추억으로 자신 역시 단골이 된 식당 소개를 자주 접하게 된다.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가 갑자기 드시고 싶다 하는 음식을 포장해 간다는, 다소 서글픈 이야기. 공통적으로 사대문 안에 내로라하는 식당의 대표 음식이 언급되곤했다. 그제야 나는 스스로 ’ 노포‘를 정의할 수 있게 됐다. 대를 이어가는 식당이 아니라, 대를 이어 ‘가는’ 식당이라고. 그리고 내가 가진 노포가 오직 이문설농탕이라는 사실이 다소 아쉬웠다. 물론 우리 가족도 그동안 숱한 외식을 했겠지만 같은 식당을 여러 번 반복한 적도,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한 곳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우리 가족의 추억이 될 식당을 직접 만들어보려 한 적도 있다. 군에서 첫 월급을 받고 나서 부모님을 모시고 인사동에 어느 한식당을 찾았다. 합리적인 가격에 특히 양념게장이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재료의 신선도를 논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나의 혀가 부족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부터 가족끼리 외식할 때 메뉴를 정하는 일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나름 경험치가 쌓인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또, 한 가지 묘수를 찾기도 했다. 바로 중식, 일식, 양식을 선택할지언정 절대 한식당을 가지 않는 것.
팬데믹의 영향도 있지만, 사실 잔치를 벌이는 일이 어색하여 아이의 돌잔치는 조촐히 양가 가족 식사 모임으로 정했다. 적당한 룸 공간에 돌상을 차리고 맛있는 식사를 즐기는 일. 가족의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장 적합한 것은 중식이었다. 코스로 나오는 낯선 요리들 끝에 자장, 짬뽕, 볶음밥 같은 친숙한 식사 메뉴까지. 손주가 주인공이라 차려진 음식에는 관심이 없어서인지 양쪽 부모님 모두 만족하셨다.
최근에 부모님 댁 근처로 이사를 오면서 손주를 보여드릴 겸 자주 외식을 하게 됐다. 집 근처에 유별난 맛집은 없지만 이제는 부담감을 떨치고 과감히 태국이나 인도 같은 해외 음식을 시도해 본다. 어머니야 손주가 잘 먹으면 마냥 행복한 분이라 그렇다 쳐도, 의외인 건 아버지가 무척 만족스러워하신다는 거다. 가족 중에 비행기를 타본 일이 정말 손에 꼽는 아버지. 비록 다소 험한 여정의 해외여행에 도전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렇게 음식으로라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참 다행이다. 지금 즐기는 이 식당이 치앙마이의 노포, 뭄바이의 노포, 케이프타운의 노포로 기억되기를.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는 푸드트럭에서부터 파인다이닝 레스토랑까지 아빠와 함께한 좋은 음식들이 그만의 노포로 기억되기를 나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