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의 말들
동아리방에는 발코니가 있었다. 길게 늘어선 동아리방 중 정중앙에 위치해 유일하게 창문대신 발코니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는 점이 좋았다. 해 질 녘 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서면 가까이는 원형 광장이, 멀리 거대한 전당이 노을과 함께 펼쳐졌다.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술을 마시며 부족한 글을 쏟아내던 시절이지만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발코니 말고 동아리방에서 마음에 들었던 건 옛 선배들이 남긴 일기장이었다. 분명 나와 똑같은 대학 생활을 보냈을 사람들일 텐데... 그들이 담아낸 문장은 나의 것과 사뭇 달랐다. 단어 하나하나가 예리한 모서리를 품었고 문장은 단호했다. 그때는 막연히 학생 운동 세대라 그런가 싶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마치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가구를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의 문체를 갖고 싶었다. 그 당시 탐을 내지 않은 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나도 얻게 될 거라 믿었기 때문. 하지만 나는 결국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서른이 되어 취재원들의 정보를 듣기 위해 SNS를 시작했다. 우연히 연결이 된 선배 한 명이 물꼬를 틀어 다른 동아리 선배들과 온라인상의 친구를 맺게 되었다. 날카롭던 사고는 여전하거나 무뎌지거나 했지만 SNS에 올리는 글에는 여전히 그들의 문체가 있었다. 그래서 반갑고 즐거웠다. 마흔 즈음된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말이다. 당시에 나는 아이가 없었기에, 그들이 종종 남기는 아이와의 대화가 마치 시처럼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저런 말을 한다고?' 나는 믿지 않았다. 문학을 전공한 부모의 조금 남다른 감수성이 아이의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돋보이게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이라 여겼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만들어내는 문장과 주술호응, 새로운 단어들이 머리를 쾅쾅 울리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동아리 선배들만큼 멋들어진 문장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기에 호주머니에 잔뜩 넣어둔 사탕처럼 혼자만 들고 있었다. 큰 의미 없는 대화에서 아이의 성장을 찾아내고 며칠을 대견해했다. 아이가 만들어낸 단어를 사흘간 곱씹어 보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별똥달'이다.
치앙마이로 가는 KE667편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먹은 뒤 아이와 나는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짙은 남색의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는 별똥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내게 물었다. "근데 별똥달도 있어요?"
유성. 별똥별이라 불리는 이 별부스러기는 지구 대기권에 들어오려다 실패하고 자신의 몸 일부를 불사른다.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망에 자신의 일부를 잃는 것. 달은 지구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어른스럽게 세월을 보낸다. 그러니 달이 별똥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달은 언제까지나 지구 곁을 맴돌 거라 별똥달은 없다고 아이에게 말했다. "달이 날아가버리면?" 살짝 무서워하는 아이를 위해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주 먼, 우리가 모두 이 세상에 없을 때일 거라고 안심시켰다.
치앙마이에서 정신없는 사흘 보낸 후 시차 탓에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문득 달이 언제 지구를 떠나게 될지 궁금해졌다. 태양의 남은 수명은 약 50억 년. 지구도 17억에서 35억 년 정도 수명이 남았다고 한다. 지구와 달은 일 년에 3.8cm씩 멀어진다고 하는데, 지구의 수명이 다할 때쯤이면 달은 어느새 지구를 떠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달은 빛을 내며 멀리 우주로 나아가게 될까. 그렇다면 아이가 말한 별똥달을 볼 수 있을 텐데... 유려하게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이런 고민의 시간을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어 오늘도 나답게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