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11개월 만에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여전히 멋진 구두를 신고 신상 샤쓰를 입고 주름살 걱정을 한다.
그러나 이제 신용카드를 쓰지 않고 체크 카드를 쓴다. 딸들한테 커피도 사주고요.ㅋㅋㅋ
동네 공원 화장실 두 곳을 호텔 화장실처럼 청소하는 엄마는 요양보호사 도전 중. A4 용지에 책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쓰는 게 엄마 조금자 씨의 공부법. 지금까지 한 묶음(500매) 넘게 썼다고 한다. 식탁 위에는 엄마의 안경과 책과 A4 용지와 연필과 지우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엄마는 실습하러 간 노치원에서 만난 친구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가 시골 살 때 가장 친했던 분들이 복남 아주머니 한수 아저씨 부부였다. 맛있는 거 했는데, 이웃집과 골고루 나눠 먹지 못할 때는, 복남 아주머니네 집에만 드리려고 집 뒷산으로 넘어갔다. 그 집에는 도포 입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가 계셔서 마당에서부터 깨금발로 걸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집과 다르게 우리 집은 엄마만 일했다. 들일은 해 지면 더 못한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한수 아저씨와 친척 아저씨는 달 밝은 밤에 우리 집 일을 해줬다. 나는 그때마다 엄마를 따라서 논에 갔고 볏단에 기대 잠들었다가 깨곤 했다. 어른들은 중요한 일일수록 소곤소곤 말했다. 광주에서 큰일이 일어난 얘기도 한밤중에 들었던 거 같다.
우리 집은 면소재지로, 다시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동네로 이사했다. 마당과 화장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쓰는 집에서 살았다. 어느 해 가을에는 추수 마친 한수 아저씨가 원자력에서 날일을 하려고 우리 집에서 주무신 적도 있다. 또 어느 해에는 복남이 아주머니가 전주 큰딸네 집에 있다고 해서 나도 엄마를 따라가서 잔 적 있다.
“어디서 봤을까요이. 내가 아는 사람 같은디...”
복남이 아주머니는 엄마를 알아보지를 못했다.
“나여, 지숙이 엄마랑게.”
엄마의 말은 복남이 아주머니에게 닿지 않았다. 여름 오기 전이었고, 아빠랑 둘이 영광읍내 K2 매장에서 사이좋게 샤쓰를 몇 장씩 사 입은(나는 이런 허영을 좋아해요) 엄마는 복남 아주머니한테도 신상 샤쓰를 선물했단다. 치매를 앓는 아주머니가 그게 누가 준 건지 모른다 해도.
아빠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의 아들. 1948년생, 할아버지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스물두 살에 조금자 씨와 결혼해서 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어른’으로 살지 않았다. 이해하다가 미워하다가 안쓰러워하다가 나는 오십 살이 되었다. 아빠가 도대체 아빠 같지 않고, 내 삶의 짐처럼 여겨져서 달아났다.
비 오는 일요일 낮, 갑자기 영광 집에 갔다. 막상 얼굴 보니까 우리는 아무 일 없던 사이 같았다. 군산에서 사 간 떡갈비를 맛있게 먹은 아빠한테 옷이랑 신발 사러 가자고 했다. 올블랙으로 차려입은 아빠는 신발장에 가득 들어있는 구두를 보여주었다. 우리 아빠가 쇼핑을 사양할 줄 아는 ‘어른’이 될 줄이야.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