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나 Apr 06. 2016

02 서성이던 날의 풍경

 1
그날이 두 번째였다. 아니 남자와 함께 갔던 것까지 생각하면 네 번째라고 해야 하려나. 하지만 함께한 두 번과 혼자의 두 번은 모든 것이 달랐으니까 아무래도 두 번째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여러 노선이 겹치는 환승역은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을 맞아 한층 더 붐비고 있었다. 사방에서 쉼 없이 인파가 몰려드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능숙하게 막힘없이 각자의 길을 갔다. 복잡해도 정체는 없었다. 처음엔 아무런 질서도 없어 보였지만 그 속에는 어떤 흐름이 있었다. 마치 해류가 만나서 섞이고 꺾이고 돌아 나가듯 유연한 덩어리로 사람들이 움직여 사라지는 광경을 여자는 잠시 지켜보았다. 질서정연한 무질서. 그 속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여자도 충분히 저 인파의 흐름에 끼어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발걸음을 멈춘 채 망설인 이유는,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굳이 그곳을 찾아온 자신의 마음이 못내 바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럴 건 또 뭐란 말인가, 이미 도착한 바에 망설이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어차피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도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부질없는 고민 끝에 마침내 여자는 발걸음을 옮겼다.



2

원래 여자는 길을 잘 못 찾았다. 주변의 풍경따위는 드물게 기억해도 동서남북의 방위는 애초에 머릿 속에 없기도 하고, 누군가를 따라 가면 특히 그 사람의 꽁무니만 쫓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처음 혼자서 이곳을 찾을 때는 불안했었다.  와보긴 했어도 주의집중 해서 걸어본 적이 없는 곳. 이제는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이 없는 낯선 곳. 그저 감각에 의지해서 걸을 뿐이었다. 이쯤에서 아마도 방향을 틀었으리라 하는 느낌으로 걸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달하자, 여자는 새삼 기뻤었다. 렇게 몸이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곳을 찾은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엔 세상이 온통 암시와 은유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남자 때문에 들었던, 남자로 인해 알게 된 노래들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장소에서 아무때고 흘러 나오는 그런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그냥 한 번 다시 와 보고 싶어졌다. 물론 별것도 아닌 일에 혼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 길을 되짚어 가 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하고 나서 그 행동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궁색한 핑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곳을 찾아가 이유없이 서성대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런 핑계라도 있어야 했다.

 
3
두 번째 방문은 한결 수월했다. 한 번 갔는데 두 번은 또 어떻겠냐는 마음이었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잠시 서성일 뿐인 일에 뭐 그리 거창한 이유까지 필요하겠냐며, 누가 묻지도 않는데 어쩐지 변명조의 말을 혼자 중얼거렸을 뿐이다.
  
풍경은 첫 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누군가를 기다렸고, 만났고, 어디론가 갔다. 자리를 지키는 건 여자와 전단지를 돌리는 몇몇 사람뿐이었다. 처음엔 남자와 처음 만났던 장소를 들여다 보며 근처를 배회하던 여자가 붙박이로 서 있기로 한 건, 자신이 지날 때 마다 기대에 찬 얼굴로 요가 학원의 전단지를 건네는 어머님때문이었다. 어머님이라니,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어색해하며 어쨌든 그러므로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서 있을수록 거리의 풍경이 눈에 더 잘 들어오고 머릿 속에서는 생각이 없어졌다. 처음 혼자 서성일 때와는 다르게 괜히 무안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초라해보이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었다. 또 하루의 일상을 마친 사람들이, 피곤함 속에서도 반가움이 반짝이는 얼굴로 마주하는 장면이 수없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어쩐지 감동적이었다. 저렇게 모두들 살아가는구나, 여자는 낯선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젊은 남자들이 지나갈 때면 한 번씩 더 눈길이 갔다. 모두가 남자와 비슷해 보였고 동시에 아무도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잘 흘렀다. 하늘이 점점 푸르게 보라빛으로 멍들어 가니 빌딩의 조명은 한층 따뜻하게 보였다. 다리가 아파왔고 아직은 쌀쌀한 밤공기에 손이 차가워졌지만 조금 더 서 있고 싶었다. 낯선 사람들만 가득한 그 거리의 풍경이 싫지 않았다.


4.

사실 여자는 어리석게도 우연을 기대했었다. 헤어진 남녀가 우연히 만나는 내용의 노래가 걷는 중에 흘러나올 때, 잠깐이지만 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해버렸었다. 그런 미신적인 태도가 우습게 느껴지면서도 '어쩌면...' 하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었다. 그래서 다시 찾아왔던 거지만 그런 자신이 못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무수한 타인들의 일상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니 문득 이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겐 아직 미련도 일상이므로 여기 이 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성실하게 그 감정을 살아내면 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한두번은 더 배회하기 위해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그때쯤엔 마음이 더 가벼워져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 곳이 아닌 곳에서 남자 역시 그럴거라 생각했다. 그러고서야 천천히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겨울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