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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에스프레소 머신 당근기

(이상하게 스윗했던 주일 밤)

by jungsin



힘겹고 엉망진창이고 보람 있는 주일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오고 나서 거의 10년 만에 찾아온 별내동. 고등학교 단짝 친구도 겨우 한 일을, 당근마켓이 이렇게 쉽게 하다니.

또 언제 봐야 하는데, 봐야 하는데 하며 십 년 동안 오지 못했던 곳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이 동네에 오는 일을 너무 대단한 숙제처럼 여겼던 걸까. 걔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걔가 보고 싶었다. 이 동네가 마치 그 애 같았다.

그냥 이렇게 오면 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지. 나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지 생각했다. 당근 차 오게 된 일이 어떤 막힌 마음을 환기할 수 있는 작은 사건처럼 느껴졌다.



밤 열 시가 다 되어 도착한 곳은 약간 유복한 분위기가 풍기는 빌라촌이었다. 1층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톡을 보내고는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숙여 카톡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었을 때, 무심하게 저돌적으로 내 코앞을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적당한 장발의 잘생기고 젊은 남자였다. 혼자 사는 듯한 느낌이 역력했다. 찰나에도 쓸쓸함이나 자취생의 마성 같은 것이 다 느껴졌다. 그즈음 어떤 큰 후속 파도처럼, 뒤늦게 각성이 일어났다.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라 정말, 야심한 밤 모르는 남자 둘이 별안간 마주치기에는 서로의 간격이 너무 가깝다고 느껴졌다. 특히 조명이 문제였다. 가로등이 너무 불필요하게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서로 당황했다.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내 느낌이 맞았다면 그런 느낌을 둘이 거의 동시에 느낀 것 같았다. 나눔이어서 물건을 확인할 생각도 없었지만, 불쾌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정말 감사합니다, 커피 잘 마실게요. 한마디만 하고 돌아서려는데.


어떻게 가시게요? 장발남이 굳이 물어본다. 시선을 피하며 아…. 저 지하철 타고 가려고요. 집이 **동인데, 왜 그랬는지 여기로 당근이 뜨더라고요. / 아 네. /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뭐 어쩌라고. 데려다 줄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가려고 하는지는 왜 물어보는 건지.)


너무 느끼한 가로등 때문에 한순간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바로 획 돌아섰다. 방향도 안 정하고는, 머신이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안하게 안고 총총 걸어나갔다.

석연치 않고 찝찝한 느낌을 뒤로 하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자, 한적한 빌라 앞에서 그와 주고받은 따듯한 느낌과 대화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역시 에스프레소 좋아하는 남자는 다 이런 구석(?)이 있구나. 조명 아래의 묘한 스윗함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도널드 덕처럼 머리를 턴다. 마귀야 떠나가라.

더운 밤에 무거운 박스를 안고 1.7km를 걸어가려니 문득 막막해진다. 백 팩 안에 있는 손가방에 머신이 들어갈까. 다리를 개구리처럼 벌리며 박스를 내려놓는데, 어딘가에서 북- 소리가 난다.

하… 청바지의 허벅지 깊숙한 쪽 민망한 부위가 찢어지는 소리였다. 패스트 패션 치고 무척 오래 입은 옷이기는 했다. 웬만하면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는 나인데, 얼른 집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실 생각에 흥분했던 거다. 큰 백 팩이나 머신을 안고 두 정거장만 잘 가리면 된다는 생각에 맘이 편해진다. 박스에서 머신을 꺼내서 손가방에 억지로 구겨 넣고 물탱크와 포터 필터는 백 팩에 집어넣자 들고 걸을 만하다. 쓸데없이 잘생긴 장발의 남자는 내게 에스프레소 머신을, 나는 청바지를 이 세계에 나눔 하면서 그렇게 생애 첫 머신 나눔을 마쳤다.



신도시의 밤은 아늑하고도 황량했다. 낯설고 무서운 길을 혼자 걷다 지하철역에 당도해 마침내 편안한 숨을 쉰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동안 한껏 심술 난 듯이 무른, 그렇지만 터지지는 않고 오히려 맛있게 무른 복숭아로 이렇게 주일을 마무리한다. 달콤함도 역시 고생을 했을 때야 극적으로 느낄 수 있구나.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무른 복숭아가 너무 시원하고 달다.




오늘의 내게는 50,000 브릭스의.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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