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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아장 거북이처럼

by jungsin



내 앞에는 노년의 부모와 딸인듯 한 중년의 여성 두 분, 그리고 사위로 보이는 한 사람의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재테크 이야기 같았다. 처음에는 여성과 남성이 가족이리라고는 생각 못하고 재무설계사 같은 사람이 아닐까 했다. 헤드폰을 벗고나서야 호칭을 부르는 것을 듣고 딸임을 알았다.

내 자리에서 불과 3미터 정도 떨어진 맞은편 자리였기에 말소리를 엿듣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분들의 태도나 분위기는 자못 진지했다. 곧이어 ‘오피스텔을 사면, 4억’과 같은 단어가 들려왔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미간이나 입꼬리 모양 같은 것의 그림체는 나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무언가 자산을 가지고 투자를 하기 위해 딸과 사위가 설득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테이블 위로 낮게, 무척 무겁고 탁한 공기가 머물렀다.

나의 오해일 수 있지만 아마 오해가 아닐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서는 ‘전형적이다, 식상하다, 뻔하다’와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돈이 중요한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징그러울 만큼 뻔하고 획일적인 곳이다. 돈, 돈, 돈. 첫때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인 곳. 지성도 학력도 내면적인 매력도 외면적인 매력도 돈의 힘 앞에서는 모두 무력해지곤 한다. 내가 가진 모든 지성으로 아무리 사유해도 이곳을 정상적인 사회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부모님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백발이 성한 아버님과 저 정겨운 어머님은,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실 수 있을까. 유한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한계, 생의 부조리와 슬픔,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묘하게 다 내 몸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저분들과 이 자리, 이 공간에 지금 이 순간 분명히 함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자리에 함께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슬프고 싸늘하고 서글픈, 생의 어떤 이면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으레 중년이 되면 부모님과 형제와 마주 앉아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마시며 저렇게 못난(죄송해요) 입꼬리와 심각한 미간으로 자산과 돈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여덟 살이 되면 자기 등을 다 덮는 네모난 가방에 책 한두 권을 덜렁덜렁 넣고, 아장아장 거북이처럼, 커다란 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 올라가듯이 말이다. 현기증과 구토감이 느껴질 정도로 한 생이 참 하찮고 부조리한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이럴수록 저런 비극적이고 못난 삶의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파이어족이 되기를 꿈꾸며 경제 서적을 공부하기보다 구약의 전도서나 모세 5경, 철학 서적을 찾아 탐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치열한 현실에서 뒷걸음질 쳐 거리를 두고 이 세계를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비극과 부조리로 가득한 현실을 이해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며 살아있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참 착하게만 산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 지점이 나에게는 인간의 조건으로서, 존엄한 인간 삶의 모습으로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다.


만화방 종일권을 끊고 푹신한 소파에 틀어박혀 숨어서 끼니마다 삼천 원짜리 라면을 하나씩 하나씩 사먹으며 종일 그간 몰랐던 일본 명작 만화의 세계를 탐닉하거나,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을 보거나, 애거서 크리스티와 앨러리 퀸의 추리소설 전집을 보거나, N. H. 클라인바움의 죽은시인의 사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현대 유럽 신학자들의 독창적이고 정통적인 저서들을 원서로 읽어나가며 삶을 관조하고 생을 멈추어놓고 시간을 펑펑 낭비하는 일이 회사원들의 거룩한 노동과 빤질빤질한 목회자들의 관성적 출퇴근과 성혼례 집례와 심방의 삶에 비해 덜 치열하거나, 덜 의미있거나, 유난히 더 쾌락 추구적이거나, 브루주아적이거나, 초라하거나, 그들의 비꼼처럼 부러워할 만하거나 호사스러운 삶일까.


온통 하천에서 뒹굴다 진흙 범벅이 된 오리처럼 사느니, 냄새나고 더러운 그곳에서 전력으로 도망쳐 가녀린 날개로 날개짓하며 배고픈 백조로 살기를 선택하고 기꺼이 자처하는 일이, 또는 그 둘 사이를 두려움 속에서 갈등하며 왕래하는 삶이, 독특한 한 개인의 이야기일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까.


적어도 내게는 힘들고 무섭고 배고픈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 또는 재미없는 일이어왔다. 이십 년 가까이를 재미와 의미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거짓과 악의 현실과 투쟁을 하려니 너무 힘이 든다.


앞 테이블의 대화란 것은 한 순간도 함께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루하고 뻔한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돈, 성, 음식을 빼면 우리의 기쁨은 없는 것만 같다. 창조적으로, 살아있음 그 자체를 만끽할 수 있는 자유는 다 사라져버렸다. 성취와 성공, 권력, 도파민을 제거하면 살맛이 하나도 없는 세상인 것만 같다.

나는 회피를 하고 있는 걸까. 가치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욕망으로 소용돌이치는 이 미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려는, 유약한 한 인간의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노력과 방황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일까. 불나방처럼 자기 욕망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악취의 중심을 경계하며 맴돎으로써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태도를 지혜자의 태도로 볼 수는 없는 걸까. 나와 저 테이블의 중년의 형제들, 누가 더 현자에 가까운 태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겁쟁이일까. 이 세계의 미련하고 현명한 배심원들에게 한 번씩은 물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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