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물로 글쓰기

문득 날카롭게 파였을 때. 아프게 베였을 때.

by jungsin



미니 프롤로그


삶은 오해와 상처를 동반한다. 오해하고, 상처 받고,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것. 그것은 특별하거나 이례적인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있는 문제이고, 잔인하지만 어쩌면 꼭 있어야만 하는 문제이기까지 하다. 그것들을 제거해야만 나의 존재가 온전해질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해와 상처와 함께 고민하고 머물러 있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사무치게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니까 더욱더 내가 되어가고, 더욱 이해의 대지를 넓혀가며, 더욱 자유로워지고,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오해와 상처, 그로 인한 치열한 괴로움은 있어야만 한다고, 그러한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나에게 배움을 주고, 나를 성숙하도록 하는 시간이라고, 깊고 매력적인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한다. 정말 그런 내가 되고 싶다.





면도날 같은 상처가

마음에 들어와 깊이 베였다면.


쭉쭉 짜야한다. 녹슨 면도칼에 깊이 베이면 쭉쭉 짜야한다. 핏물이 더 나오지 않을 때까지 아낌없이 짜야한다. 지금 당장 모든 감각과 사유를 글로 써야 한다. 피가 응고되기 전에 우선 남김없이 짜내야 한다. 퇴고는 나중에 하면 된다. 물론 나중에 퇴고가 힘들겠지만, 퇴고가 힘들 것을 고려해 조금씩만 짜서 찍어 바르려는 것은 상처 받지 않고, 아프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알량한 생각이다.

핏덩이 같은 어떤 문장들은 한순간 깊이 베여 바다에 던져져 버린다. 한참을 바닷물 속에 깊숙이 잠겨있다가 어느 날 일렁이며 물 위에 떠 오른다. 충분히 떠돌다가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 뭍에 닿는다. 그렇게, 빛나는 바닷가에서 주워 바싹 말린 문장들은 감칠맛이 돈다. 딱 적당히 간이 배 있다. 바삭하거나, 또는 쫀득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글이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일이 쉬운 것도, 또 매번 잘 숙성되는 것도, 숙성된 후라고 해서 쉽게 써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뭉클한 순간을 곧바로 써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양치질하다가 헤어진 여자애 때문에 눈물이 차오르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다가 불현듯, 어떤 시큼한 삶의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는 감정이나 생각이 있다. 방금 베인 감정은 아직 핏물에 젖어 축축하다. 다만 흥건히 젖은 몇 문장이 분명한 단서도, 근거도, 맥락도 없이 떠오른다. 어쩌면 무엇을 쓸지도, 글이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로다. 그렇게 쓸 때의 문장들은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도, 햇볕에 바싹 마르지도 않았다.

그럴 때 나는 아리거나 베인 느낌을 붙잡고 그냥 무작정 글을 쓴다. 그 느낌 뒤에 몇 문장들이 함께 혈전처럼 뭉쳐있지만, 아직 감정이 추슬러지지도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뜨거운 청춘과도 같은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확장해가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펄펄 끓던 나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살아가며 이따금, 녹슨 면도칼이 심장을 벨 때가 있다. 깊숙이 수욱- 하고, 베이면 아리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그러한 때는 우선 충분히 머무는 것이 좋다. 시적이거나 신적인 순간일지 모른다. 이즈음은 삶에 그러한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 무척 드물고 소중한 일이라고 느끼고는 한다.

그렇게 어떤 아득한 순간에 머물다가는, 이제 정신 차리고 그 핏덩이들을 움켜쥐고 책상으로 달려가고 싶다고 생각하곤 한다. 잊히기 전에, 얼른 노트북을 켜고 하얀 화면에 핏덩이들을 찍어 자국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이따금 글은 그렇게 문득 예기치 않게, 앙큼하고 서늘하게 떠오른다. 소중하고 신비로운 순간이다. 보드라운 살결 뒤에 그처럼 붉은 피가 숨어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이 글도 일말의 단서가 되는 감정과 생각, 그리고 축축한 몇 문장을 붙들고 썼다. 그래서인지 비릿하다. 살아있는 것들은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생선 몇 토막처럼 젖어있고 비리다. 글쓰기도 그렇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새빨간 피와 같은 것이다. 사랑도 그렇다. 글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렇다. 메마른 명사보다 움직이는 동사에 가까운 것이다. 어딘지 비릿하고 촉촉이 젖어있고 펄떡이며 살아있는 생명의 감각이다.

그림이나 음악, 글쓰기.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들이 성취가 될 수 없는 것은 사랑이 그러한 것과 같다. 애초 성취 따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 무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피에 물이 섞이면 생명력이 약해지는 것처럼, 사랑이란 응당 어떤 불순물도 반기지 않기 마련이다. 검붉은 이야기의 모세혈관은 물이 아니라, 성취가 아니라, 아직 마르지 않은, 비린내 나는 핏물을 붙들고 쓰는 사람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반길 것이다.




높이 높이,

앨버트로스.


그들은 앨버트로스의 자유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공기를 박차고 올라, 큰 두 날개로 공기 입자를 자근자근 누르며 높은 하늘 위에서 시원한 맞바람을 맞으며 떠 있는 큰 새들의 자유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순간을 위해 문장들로 날개 쳐 올라가는 것이다. 섬세한 감정의 입자를 딛고 날갯짓하는 것이다.


일을 깨고 나온 아기새의 예민한 문장들은 깃털이 되고, 날개를 이룬다. 그렇게 어느 날 큰 날개를 펴고 바람 위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하늘 높은 곳의 자유롭고 향기로운 공기 질감을 느끼며 떠있게 되는 것이다. 앨버트로스의 자유는 그런 자들에게만 허락될 것이다. 그러니까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 핏물로 글을 쓰는, 그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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