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히 살아있을 수 있는 비결에 관해
정말 살아있는 생생한 현실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내 안의 현실이었다. 내 밖의 현실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생생한 삶에 대한 목마름은 햇볕을 받지 못해 내면에 곰팡이를 피웠다. 이야기의 거름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이다. 결코 한번도 바라거나 꿈꾼 적도 없는 독특한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이다. 삶의 시공간이 주는 질감은 불행하던 어느 시절과 마찬가지로 퍽퍽했다. 하지만 내 안에 이야기가 풍성하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숨다운 숨을 쉬게 했다.
이즈음 난 많은 이야기를 머금고 있어 할 말과 쓸 글로 넘쳐나곤 했다. 덕분에 힘든 중에도 넉넉히 괜찮을 수 있었다. 오해와 소통 안됨과 분노와 오기와 고집과 미움과 아쉬움과 상실감, 걱정과 두려움, 창피함과 공허함과 답답함이 날 집어삼킬 때면 별도리 없이 절망하곤 했다. 내 삶도, 나 자신도 내가 장악할 수 없는 것임을 실감했다. 스스로를 한심하게 느끼게 됐고, 삶은 일순간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변함없이 호기심과 꿈으로 가득한 눈빛이 있고, 마음의 빈 공간이, 꿈의 여백이 있어 삶이 가득했다. 빈 공간이 삼투압 작용하며, 늘 가득히 유혹했다. 의미의 시간, 또는 의미의 존재가 어둠에 잠겨있는 흑빛 마음을 기다려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슬며시 능청스럽게,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이 말갛게 씻긴 새로운 얼굴을 내밀고는 했다.
나의 삶과 시간은 늘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무언가, 내 밖에서 다가오는 희망이랄지, 신의 카이로스의 시간이랄지 하는 것이 틀림없이 있는 듯하다. 내 바람대로, 내 방식대로 가득 찼었다면 느낄 수도 가질 수도 없었을, 새로운 빈 가득 참의 감각이다.
속내는 늘 생생한 현실로써만 가득 차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나의 현실의 삶을 설렘의 시간들로 넘치도록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참담한 편이었다. 가득 찰 줄 알았던 나의 시간이 메마르거나 텅 비게 되어버리곤 했다. 슬프다기보다는 멍해지고는 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럴수록 내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차올랐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현실의 삶이 가득 차올랐다면 지금처럼 나의 내면에, 이토록 그윽하고 깊은 거름 냄새가 날 수 있었을까. 상상하거나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오히려 이렇게 더욱 가득 찰 수가 있다니 신비롭기만 하다.
그렇게 늘 내 빈 곳으로 차고 들어오는 이야기로 마음 가득히 풍요로울 수 있었다. 비어있게 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하고 몰랐을 그 모든 것들을 껴안는다. 삶은 그런 방식으로 아름답다. 변증법적인 희망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중력의 우주에서 고요히 부유하고 있었다면, 아무 탈도 마찰도 없었겠지만, 그러한 곳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까. 중력이 이끄는 세상이어서 부딪히고 긁히며 이야기의 톱밥을 만들며 살아간다. 이러한 내게 세상은 이해하고 느끼고 싸우고 모험할 것들로 풍성하다. 정말 나의 희망이 끝나는 때는, 내가 완벽해질 때라든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성취했을 때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이야기가 종말하는 때다.
통달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통달하면 끝나는 것이다. 더욱이 이해의 세계에서 통달이라는 것은 없다. 다 알았다, 완벽히 이해했다, 오직 내 말이 맞다, 내 생각에는 빈 틈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실은 자신의 확신과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들을 줄도, 이해할 줄도, 침묵하여 깊이 느끼고 삼키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통달했다는 건 이해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이 아름다운 중력의 행성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결핍된 채, 있는 그대로 모험하고 부딪혀야 한다. 살아있는 나무 살에 도끼질이 가해지는 듯한 아픔을 감수하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갈등과 말썽과 함께 긴장의 이야기는 팽팽하게 당겨진다. 오로지 그런 모습일 때 새로이 익는 제철 과일처럼 싱싱하고 푸릇푸릇하다. 결핍과 오해로 가득하여도,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숨 쉬며 여전히 목말라하며 꿈꾸고 있을 때, 새 봄의 벚나무 순처럼 새롭다.